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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내 이란 동결 계좌 8조원…국익 지킬 방안 찾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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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미국-이란 관계 정상화 비밀 협상

신동찬 법무법인 율촌 파트너변호사

신동찬 법무법인 율촌 파트너변호사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는 미국과 중국이 화해 무드를 이어갈 무렵 “코끼리들이 싸울 때만 잔디밭이 망가지는 게 아니다. 그들이 요란스럽게 사랑을 나눠도 잔디가 상한다”고 말했다. 강대국들이 갈등할 때뿐만이 아니라 사이가 좋을 때도 약소국들의 권익이 짓밟힐 수 있음을 경계했다.

지금도 미국은 중국과는 반도체 및 대만 문제로 첨예하게 부딪히고, 침략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와는 우크라이나를 군사적으로 지원하면서 충돌하고 있다. 또 하나의 적대국과는 비밀리에 관계 개선을 추구하고 있는데, 이는 뜻밖에도 상당수 우리 기업들에는 기회이자 위험이 되고 있다. 이 나라는 바로 미국이 ‘불량국가(rogue state)’라고 지칭한 이란이다.

미국의 경제제재로 이란산 원유 수입대금 국내 원화 계좌에 쌓여
미-이란 협상서 한국 등에 있는 이란 동결 자산 해제도 논의할 듯
한국 선박 나포했던 이란, 자금 반환 요구하며 국제 소송 움직임
미국과 소통하면서 이란에 미수금 있는 국내 기업도 보호해야

오만·뉴욕 등지에서 꾸준히 만나

FILE PHOTO: Atomic symbol and USA and Iranian flags are seen in this illustration taken, September 8, 2022. REUTERS/Dado Ruvic/Illustration/File Photo

FILE PHOTO: Atomic symbol and USA and Iranian flags are seen in this illustration taken, September 8, 2022. REUTERS/Dado Ruvic/Illustration/File Photo

지난 6월 영국의 이란 전문 매체가 미국과 이란이 오만과 뉴욕 등에서 비밀협상 중임을 보도했고, 서방 주요 통신과 신문의 후속 보도가 이어졌다. 1979년 2월 이슬람 혁명 당시 이란 측이 테헤란 주재 미 대사관 직원들을 444일이나 인질로 잡았던 이래, 미국과 이란은 오랜 적대 관계를 유지해 왔다.

아들 부시 대통령은 2002년 연두교서에서 이란을 북한과 당시 독재자 사담 후세인이 집권 중이던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axis of evil)’의 하나로 지칭했다. 특히 이란이 중동에서 미국의 가장 강력한 우방인 이스라엘을 노린 핵무기를 개발한다는 의혹이 2000년대 중반에 제기되자 미국은 전례 없는 포괄적 국제 경제 제재로 대응했다. 그러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때 이란은 핵개발 의혹이 있는 자국 내 시설들에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받기로 하고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국제 사회는 이란에 대한 경제 제재를 해제하는 포괄적 이란핵합의(JCPOA)가 타결됐다.

하지만, 오바마의 후임자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2018년 JCPOA를 파기하며 대(對)이란 경제 제재를 일방적으로 부활시켰다. 오바마 시절 부통령이던 조 바이든이 2020년 미 대선에서 트럼프를 꺾고 집권했지만 이란핵 합의가 금방 부활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관계 개선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회와 위기, 한국에도 큰 여파

초강대국 미국과 중동의 강자 이란이 다시 화해한다면 좋은 일 아닐까. 특히 트럼프 행정부의 이란 제재 부활로 이란과의 사업과 교역 기회가 막혔던 한국 기업엔 요즘 다시 불기 시작한 중동 붐을 확산시킬 절호의 기회라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외신에 흘러나오는 양국 간 비공식 협의 내용을 살펴보면 한국에 마냥 희소식만은 아니다.

이란 관련 사건 일지

이란 관련 사건 일지

그 이유는 미국과 이란 간 비밀 협상에서 큰 ‘팻감’으로 쓰일 수 있는 게 바로 한국에 있는 이란 동결 자금이기 때문이다. 국내 언론이나 외신 등에서 70억 달러 규모라고 보도된다. 국내 시중은행 두 곳에 있는 원화계좌라 달러 환산 금액은 달라질 수 있다. 정확히 공개된 적이 없지만 대략 8조원 규모로 추산된다.

비밀협상이라 이란이나 미국 모두 공식적으로 이를 부인하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양국 간 비공식 합의안은 JCPOA를 전면 재복원하는 것에는 이르지 못한 것 같다. 내년 대선에서 트럼프와 재대결해야 할 가능성이 큰 바이든 대통령에게 JCPOA 전면 재복원은 이란에 지나치게 유화적이라는 공격을 당할 빌미가 될 수 있다.

대신 부분적·잠정적인 합의로 양국 간 긴장을 낮추는 정도일 것이란 관측이 유력하다. 이란이 IAEA의 핵사찰을 일부 수용하고, 핵무기 제조에 쓰일 수 있는 우라늄 농축을 일정 수준으로 제한한다. 또 이란이 억류 중인 미국인들을 석방하는 대신, 미국은 해외의 이란 자산을 이란이 국내로 반입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내용이다.

2010년 한국-이란 원화 결제 합의

문제는 ‘해외의 이란 자산’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한국에 있는 동결 자금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이란 자금이 국내 시중은행 두 곳에 동결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이란 핵개발 의혹에 따른 국제사회의 이란 경제 제재와 관련이 있다.

오바마 행정부는 이란 핵합의 5년여 전인, 2010년 7월 1일 그때까지 이란에 대하여 시행했던 제재 중 가장 강력한 제재인 포괄적 이란 제재법(CISADA) 시행을 시작했다. CISADA의 핵심은 이란의 핵무기 개발을 위한 자금원이 될 수 있는 이란의 석유·가스 분야에 투자하는 외국 기업들에 대한 이른바 ‘세컨더리 보이콧’을 가혹하게 집행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김영희 디자이너

김영희 디자이너

이는 당시에 이란에 진출한 한국 건설사·정유업체·종합상사 등 3000여 개 기업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내용이었다. 당시 한국 정부는 미국의 양해 하에 이란과 한국 간 교역을 국제 제재를 준수하며 진행하고, 미 달러화를 국제 금융망을 통해 거래하지 않으며 한국과 이란 간 원화 결제계좌를 만들어 한국 기업들의 이란 교역을 정리해 나가기로 이란과 합의한다.

한국과 이란 간 원화 결제계좌란 당시 연간 110억 달러 규모(전체 원유 수입량의 9.7%)로 이란산 원유를 수입하던 국내 정유사들이 원화로 대금을 지급하고, 이란 측에서는 우리은행과 기업은행에 개설된 이란 중앙은행 명의의 계좌로 받기로 한 것이다. 국제통화가 아닌 원화를 받은 이란으로서는 달리 쓸 곳이 없었기 때문에, 해당 계좌에 쌓인 원화를 이란이 한국에서 수입하는 가전제품과 철강 제품 등의 대금으로 정산하는 용도로 쓰기로 한다. 이것이 바로  한국-이란 간 원화결제시스템이었다.

원화결제시스템은 국제 사회의 이란 경제 제재 중에도 양국 교역을 지탱해 주었고, 2015년 7월 JCPOA 타결로 이란에 대한 국제 사회의 경제 제재가 해제된 이후에도 활용됐지만, 2018년 5월 트럼프가 JCPOA를 파기하고 그 다음 해 5월 이란에 대한 모든 제재 예외 인정도 거부했다.

미국의 강력 제재로 다시 동결

이 상황에서 국내 시중은행이 이를 계속 운영한다면, 미국의 이란 제재 법령에 따른 강력한 제재를 받아 국제 금융시장에서 사실상 퇴출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한-이란 간 원화결제시스템은 중단됐고 이 계좌는 동결됐다. 이란은 그간 줄기차게 한국 측에 이 자금의 반환을 요구해 왔고, 2021년 1월 호르무즈 해협을 항해하던 한국 유조선을 이란의 이슬람혁명 수비대(IRGC)가 나포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당시 나포가 인질극이 아니냐는 지적에 이란 정부 대변인은 “한국 정부가 70억 달러를 볼모로 잡고 있다”고 말했을 정도다.

미국과 이란 간의 협상이 타결돼 원래 이란 소유인 돈을 돌려주는 것이 뭐가 문제냐고 할 수 있겠지만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다.

한국-이란 간 원화 결제 계좌가 2019년 5월 갑자기 닫히는 바람에 상당수 한국 기업도 이란 측 상대방 바이어 등으로부터 받아야 할 물품 대금 등을 떼인 경우가 많았다. 그동안 이 미수금을 회수할 경우에 미국의 이란 제재 대상에 오를까 봐 냉가슴만 앓았던 경우도 있다.

‘닭 쫓던 개’ 신세 되지 말아야

한국 정부는 그간 미국과 유럽연합(EU) 등이 이란과 진행하였던 이란 핵합의 복원 협상을 주시해 온 것으로 안다. 하지만 미국-이란 간에 벌어지는 비밀협상 내용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이란이 한국 기업에 빚진 돈을 동결 자금에서 갚지 않고 이란 중앙은행 명의 계좌에서 돈을 모두 찾아간다면, 미수금이 있는 국내 기업은 자칫 ‘닭 쫓던 개’ 신세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국제 사회로의 복귀를 다짐하는 이란으로서도 미수금이 있다면 제대로 변제하는 것이 국제 거래를 하는 책임 있는 당사자의 자세일 것이다.

이란에서 받을 미수금 규모는 몇 년 전 정부가 코트라를 통해 조사한 적이 있는데,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그동안 연체 이자가 붙었을 테니 정부가 정확한 규모를 재조사할 필요가 있다. 미국도 동맹국인 한국의 기업들이 오랜 적대국 이란에 돈을 떼이고, 이란이 한국산 가전과 철강 제품 등을 공짜로 쓰게 되는 상황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이란과의 관계 개선, 변수 많아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한미동맹이 공고해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달 18일 미국 대통령의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한미일 정상회담도 열린다. 한국 정부는 튼튼한 한미동맹의 기반에서 미국-이란 간 협상에서도 한국의 권익이 침해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대비할 필요가 있다.

미국과 이란 관계 변화에 따라 한국도 이란과의 무역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지에 대한 국가 차원의 고민을 해야 한다. 바이든이 재선되면 이란 핵합의가 부활할 가능성이 있고, 그렇게 된다면 이란 시장이 다시 열린다. 이 시장을 한국 기업이 놓칠 수는 없다. 반면 트럼프나 공화당의 다른 후보가 당선된다면 이란과의 무역 지속은 미국의 제재 대상이 될 수 있으니 신중히 해야 한다.

아울러 최근 이란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투자자 국가 소송을 제기하기 위하여 이란 의회에 승인을 요청했다는 취지의 외신 보도가 있었다. 앞에서 언급한 미국과의 비공식 협상에서 협상 카드로 쓰면서 한국 정부도 압박하기 위한 이란 정부의 양면 작전일 수 있다. 이렇게 치열한 국익 경쟁이 벌어지는 것이 한층 분명해졌기에, 이란과 거래했던 국내 기업과 국민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관심과 노력이 더욱 절실해졌다.

신동찬 법무법인 율촌·파트너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