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MC, 탈대만화 없다지만…” 대만의 아킬레스건 찌르는 미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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팻 겔싱어 인텔 CEO. 인텔

팻 겔싱어 인텔 CEO. 인텔

“대만은 안정적인 곳이 아닙니다. 중국은 이번 주에만 대만 방공식별구역(ADIZ) 내에 인민해방군 군용기 27대를 보냈지요.”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2021년 12월 1일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포춘 브레인스톰 테크’(Fortune Brainstorm Tech) 컨퍼런스에서 돌연 대만 이야기를 꺼냈다. 당시 반도체지원법(칩스법)의 미 의회 통과를 앞둔 상황에서 한국의 삼성전자나 대만 TSMC 같은 아시아 반도체 업체보다 인텔과 같은 미국 반도체 업체에 더 많은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는 취지에서 나온 말이었다.

당시 겔싱어의 발언을 두고 미국과 한국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지만 지구 반대편 대만에서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주요 대만 언론들은 일제히 겔싱어의 말을 대서특필했다. 이후 겔싱어와 인텔에 대한 날선 비난이 쏟아졌다. “그렇게 불안정한 곳이라면 인텔은 왜 TSMC에 반도체 생산을 맡기나?” “도저히 이길 수 없으니 억지를 부려 공격하는 것” 등 비판 여론이 극에 달했다.

지난 2012년 투자자 앞에서 연설하는 TSMC의 창업주 모리스 창. TSMC는 세계 1위 반도체 파운드리 업체다. 연합뉴스

지난 2012년 투자자 앞에서 연설하는 TSMC의 창업주 모리스 창. TSMC는 세계 1위 반도체 파운드리 업체다. 연합뉴스

TSMC 창업주 모리스 창(張忠謀)까지 직접 나서 “미국 정부 보조금을 더 받으려는 얄팍한 시도”라며 “인텔은 다시 영광의 시대로 돌아갈 수 없을 것” 등 거친 말을 있는 그대로 쏟아낼 정도였다.

반도체 업계 한 관계자는 “지정학적 문제, 특히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은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TSMC, 나아가 대만 전체에 있어 일종의 ‘발작 버튼’과 같다”고 말한다. 전 세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1위 TSMC의 사실상 유일한 ‘아킬레스건’으로 꼽히는 지정학적 리스크가 잊을 만하면 터져 나오고 있다.

지난 4월 대만 동부 해역에 등장한 중국 항모 산둥함을 지켜보고 있는 대만 군인. AFP=연합뉴스

지난 4월 대만 동부 해역에 등장한 중국 항모 산둥함을 지켜보고 있는 대만 군인. AFP=연합뉴스

지난달 31일(현지시간)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는 “최근 중국이 대만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새로운 옵션에 주목하고 있다”면서 “에너지야말로 새로운 약점”이라고 지적했다. “섬나라인 대만은 에너지 수요의 97%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면서 “TSMC만 해도 이미 대만 전체 에너지 소비량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전면 봉쇄나 군사적 개입 없이도 대만의 에너지 수입을 일정 기간 중단시킨다면 큰 타격을 줄 것”이라고 전망했다. 대만은 석탄의 경우 39일, 천연가스의 경우 불과 11일 수준의 비축량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포린폴리시는 TSMC가 갈수록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상황에서 대만의 미래 에너지 안보가 점점 위태로워질 것이라 관측했다. 오는 2030년까지 TSMC가 1㎚(나노미터·1㎚는 10억 분의 1m) 공정 양산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현재 전력 소비량의 2.6배 수준이 필요할 것으로 분석된다. 대만은 한때 8기의 원자력발전소를 가동했지만 2025년을 목표로 탈(脫)원전을 추진하면서 대부분 석탄과 천연가스 발전에 의존하고 있다.

정근영 디자이너

정근영 디자이너

잇따른 외부의 불안감 어린 시선에도 TSMC가 당장 무게추를 미국 등 외국으로 옮길 가능성은 현재로써는 희박하다. 이런 가운데 지난달 28일 대만 북부 신주 과학단지에서 열린 TSMC 신규 R&D센터 개소식은 “TSMC가 언젠가는 대만을 버리고 떠날 수 있다”는 일각의 우려 섞인 시각을 해소하기 위해 대만 반도체 업계 거물들이 모두 모인 일종의 ‘부흥회’ 현장을 방불케 했다. TSMC가 2025년 양산을 목표로 하고 있는 2나노 최첨단 미세공정 기술을 중점적으로 개발할 신규 R&D센터에는 다음 달까지 7000명이 넘는 반도체 전문 연구인력이 근무할 것으로 알려졌다.

TSMC 본사. 블룸버그

TSMC 본사. 블룸버그

웨이저자 TSMC CEO는 “이 R&D센터가 대만에 뿌리를 유지하고자 하는 회사의 굳은 의지를 보여준다”면서 “TSMC는 전 세계에 생산 투자를 진행하고 있지만 중심을 옮기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왕메이화 대만 경제부장(장관) 역시 이날 “이제 ‘탈대만화’라는 말은 더는 나오지 않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90살이 넘는 모리스 창도 직접 개소식 현장에 참석해 힘을 실어줬다. TSMC는 최근 대만에 3조7000억원을 투자해 첨단 반도체 패키징 공장을 추가로 짓기로 했다.

강준영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는 “미국은 내년 대만 총통 선거와 미국 대선을 앞두고 위기감을 조성해 대만과 TSMC를 중국과 단절시켜 가능한 밖으로 끌어내려 할 것”이라면서 “이에 맞서 대만과 TSMC는 무게중심을 계속 자국에 두고 가능한 버틸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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