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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아내 사망' 남편 88억 승소…'한국어 능력' 갈렸다 [사건추적]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경부고속도로 천안IC 부근에서 교통사고로 캄보디아 출신 아내가 숨진 사건과 관련해 지난 2019년 형사재판 과정에서 현장검증을 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경부고속도로 천안IC 부근에서 교통사고로 캄보디아 출신 아내가 숨진 사건과 관련해 지난 2019년 형사재판 과정에서 현장검증을 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2014년 경부고속도로 천안IC 부근. 새벽녘에 이모(53)씨가 운전하던 승합차가 갓길에 정차돼 있던 8톤 트럭을 굉음을 내며 들이받습니다. 조수석에 타고 있던 이씨의 캄보디아 출신 아내 A씨(사망 당시 24세)는 그 자리에서 숨졌습니다. 그런데 이씨는 A씨 앞으로 보험 33개(사망보험 26개)를 들어놓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사망보험금만 약 95억원. 검찰은 이씨가 일부러 교통사고를 냈다며 살인 등 혐의로 기소합니다. 이른바 ‘캄보디아 만삭 아내 사망’ 사건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씨에겐 무죄가 확정됐습니다. 대법원은 “졸음 운전인지 고의사고인지 단언할 수 있는 객관적 증거가 없다”며 사건을 대전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이어진 파기환송심에선 이씨에게 교통사고처리특례법상 치사죄만 적용해 금고 2년형이 선고됐습니다. 살인죄 무죄가 나왔으니, 이씨는 아내 앞으로 들어놓은 보험금을 다 받을 수 있을까요?

이씨는 사고 후 미래에셋생명·삼성생명 등 보험사 12곳을 상대로 보험금 청구 소송을 내 9개 보험사한테 승소했습니다. 대법원에서 확정된 건 아니지만 현재까지 승소한 금액만 88억9825만원(지연손해금 제외). 이 가운데 새마을금고중앙회를 상대로 낸 소송은 올해 4월 대법원에서 이씨 승소가 확정됐습니다.

쟁점 된 한국어 실력…보험사들 “계약 이해 못해 무효”

서울 서초구 삼성생명 본사. [뉴스1]

서울 서초구 삼성생명 본사. [뉴스1]

법정에서 보험사들의 주장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습니다. ① ‘고의로 살해한 것이라 보험금을 지급할 책임이 없다’ ② ‘보험금 부정 취득 목적으로 계약을 체결한 것이라 무효다’ ③ ‘캄보디아 출신 아내 A씨의 동의를 받지 않아 무효다’.

살인 혐의에 대해 무죄가 선고되면서 ①번 주장은 이씨의 보험금 소송을 심리한 12개 재판부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들 재판부는 이씨가 다른 목적을 가지고 보험에 가입한 것도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A씨는 이씨와 2008년 결혼했고 2014년 사고로 사망했는데, 이씨는 결혼 직후부터 꾸준히 다양한 보험을 본인과 A씨, 딸 명의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법원은 이씨가 정기예금 등은 별로 이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이씨가 보험을 예·적금과 유사한 금융거래 수단으로 활용했던 것”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매달 내는 보험료만 427만원이었지만, 이씨가 운영하는 가게가 잘 돼 감당할 만한 수준이었다고 봤습니다.

재판부 사이에 판단이 엇갈린 부분은 ③번이었습니다. 상법상 다른 사람이 죽으면 보험금이 나오는 보험에 가입할 경우, 그 사람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A씨는 보험에 가입할 때 자필 서명을 하고 보험설계사에게 설명을 듣긴 했지만, 보험사들은 외국인인 A씨가 보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일부 재판부는 2008~2011년 가입하거나 보험계약자가 변경된 3개 보험이 이 주장에 따라 무효라고 판단했습니다. 2008년 2월 한국 입국 전까지 A씨는 한국어를 전혀 몰랐고, 당시 19살로 사회경험도 많지 않아 보험계약도 생소했을 거라는 이유였습니다. ‘A씨와는 말이 안 통했다’ ‘수술에 대해 이씨에게 설명해줬다’는 산부인과 의사(2008년과 2011년 A씨 수술 담당)의 증언 등이 주요 근거가 됐습니다.

“말 안 통했다” vs “귀화시험도 합격”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서울고등법원 청사 전경. [서울고등법원 제공]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서울고등법원 청사 전경. [서울고등법원 제공]

라이나생명(2008년 가입, 2011년 A씨로 계약자 변경) 건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민사19부(부장 이민수)는 “한국어 연습 노트를 보더라도 보험계약 변경 당시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의 한국어 연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며 이씨의 청구를 기각했습니다.

반면 나머지 23개 보험에 대해 다른 재판부들은 A씨가 제대로 이해하고 서명한 게 맞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A씨가 매일 이씨와 가게에서 일하며 손님을 응대해 한국어를 빨리 배웠다고 본 겁니다. 실제로 A씨는 2013년 11월엔 상당한 한국어 실력이 요구되는 귀화시험에도 합격했다고 합니다.

엇갈린 1심 판단…2·3심 결론은

문제는 A씨가 언제부터 보험 계약을 이해할 정도로 한국어 실력이 늘었냐는 겁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19부는 2011년 5월 기준으로 A씨의 한국어 실력이 부족하다고 봤는데, 같은 법원 민사26부(부장 윤도근)는 그 이전인 2009년 6월에도 A씨가 한국어를 충분히 잘 했다고 보는 등 판단이 엇갈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대법원이 효력을 인정한 새마을금고 보험(2009년 11월) 이후 가입된 보험들은 효력을 인정받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 이전에 가입한 10개 보험에 대해선 2~3심 판단을 기다려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오는 8월 25일엔 라이나생명을 상대로 이씨가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 재판이, 9월엔 우체국보험과 삼성화재 상대 소송의 항소심 선고가 예정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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