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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자 칼같은 로봇 지휘자…단원들과 교감은 못 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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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인간형 안드로이드 로봇 ‘에버6’가 26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에서 국악관현악곡 ‘말발굽 소리’를 지휘하기 위해 단원들 앞에 서 있는 모습. [뉴스1]

인간형 안드로이드 로봇 ‘에버6’가 26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에서 국악관현악곡 ‘말발굽 소리’를 지휘하기 위해 단원들 앞에 서 있는 모습. [뉴스1]

청아한 가야금 소리가 울려 퍼지고 아쟁 소리가 뒤따르며 흥을 돋웠다. ‘둥둥’ 북소리와 어우러지는 힘찬 멜로디는 말들이 초원을 내달리는 모습을 떠오르게 했다. 연주자들의 시선이 가 닿은 곳은 사람 지휘자가 아닌 인간형 안드로이드 로봇 ‘에버(EveR)6’. 국내 최초로 오케스트라 지휘에 도전한 사람 모양의 로봇이다.

26일 서울 국립극장 국립국악관현악단 연습실에서 만난 에버6는 신장 1m 80㎝의 사람 모양을 하고 있었다. 2006년 한국생산기술연구원에서 탄생한 국내 최초 안드로이드 로봇 ‘에버’의 여섯 번째 버전이다. 에버6의 조상 격인 에버3는 2009년 국립국악관현악단 공연에서 소리꾼으로 무대에 올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에버6가 이날 지휘한 곡은 국립국악관현악단 레퍼토리로 많은 사랑을 받은 ‘말발굽 소리’다. 박자가 빠르고 멜로디가 경쾌해 초원을 달리는 말을 연상케 한다. 국립극장 측은 “빠르고 정확한 동작 수행이 가능한 로봇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곡을 선곡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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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 동작은 생각보다 자연스러웠지만 에버6에게는 청음 기능이 없다. 연주자들이 만들어내는 소리를 듣고 즉석에서 음의 강약과 박자의 빠르기에 대한 지시를 내리는 인간 지휘자와 달리 에버6는 지휘자의 모션 캡처를 그대로 따라 할 뿐이다. 이날 에버6가 선보인 지휘 동작은 정예지 지휘자의 움직임을 모션 캡처 방식으로 복사해 에버6에게 입력한 것이다.

시연이 끝나고 기자간담회에서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고 인간의 움직임을 모방하는 데 그친다면 로봇 지휘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는 취재진의 질문에 개발자인 이동욱 박사는 “대화형 로봇을 만들 때 가장 어려운 점이 로봇이 적절한 제스처를 취하도록 하는 부분”이라며 “그럴싸한 문장을 구사하는 단계까지는 왔지만 상대방의 말을 듣고 적절한 손짓과 고갯짓을 섞어가며 비언어적으로 공감을 표현하는 단계까지는 오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에버6의 지휘 동작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얼마나 사람과 흡사한지를 눈여겨 봐주시면 좋겠다”고 답했다.

에버6 개발 과정에 대해 이 박사는  “정예지 지휘자와 에버6의 신체 사이즈가 달라서 그대로 ‘복사 붙여넣기’를 하면 자연스러운 동작이 나오지 않는다”며 “자연스러운 동작이 나올 때까지 팔꿈치와 손목의 각도, 관절 가동 범위를 수정했고, 지휘봉이 원하는 방향을 가리킬 수 있도록 각도를 교정하면서 지휘 동작을 구현했다”고 설명했다.

최수열 지휘자는 “청음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에버6는 지휘자라기보다 지휘 동작을 수행하는 퍼포머에 가깝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만 에버6의 지휘 동작이 굉장히 섬세한 것에 놀랐다. ‘말발굽 소리’처럼 템포를 균일하게 가져가야 하는 곡을 지휘할 때는 사람 지휘자와 달리 박자를 절대 양보해주지 않기 때문에 보다 정확한 표현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날 에버6는 홀로 ‘말발굽 소리’를 지휘한 데 이어 손일훈이 작곡한 ‘감(感)’을 지휘자 최수열과 공동으로 지휘했다. ‘감’은 오선지 악보 없이 최소한의 컨셉트만 합의한 채 연주자와 지휘자가 즉흥으로 연주하는 곡이다.

최수열 지휘자는 “‘감’에서 에버6는 연주자들이 어디쯤 와 있는지를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며 “이 곡은 12분 분량에 30개 주기로 이뤄져 있는데 주기의 시작과 끝, 주기와 주기 사이의 휴지부를 짚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에버6”라고 설명했다. 한마디로 타이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에버6의 역할이 기대했던 것보다 제한적이라는 취재진의 지적에 여미순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 직무대리는 “예술적으로는 어떤 뚜렷한 길이 보이지 않아도 일단 가 보는 것, 일단 도전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로봇 지휘자라는 컨셉트가 없었다면 ‘감’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곡이다. 아직 로봇 지휘는 걸음마 단계지만 상상력을 발휘해 여러 실험을 해보려고 한다”고 답했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은 30일 국립극장에서 에버6가 지휘자로 나서는 공연 ‘부재(不在)’를 관객에게 선보인다. 국내에서 로봇이 지휘자로 나서는 공연은 이번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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