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판사와 79% 답 같았다"…시간 아끼는 'AI 판사' 나올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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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중알코올농도 면허취소 수준, 음주운행 거리 20㎞, 적발시간 오후 8시35분경.

인공지능(AI) 법률상담 플랫폼에서 형량을 예측하기 위해 지난 25일 발생한 한 현직 경찰관의 음주운전 기록을 입력해봤다. A씨가 과거 같은 전과가 없고, 집행유예 기간에 일어난 사고가 아니라고 추가로 입력하자 평균 형량이 벌금 600만원이라는 답이 나왔다.

좀 더 구체적인 결과를 알아보기 위해 이미 재판 결과가 나온 다른 음주운전 사건의 조건도 입력해봤다. 지난해 7월 18일 오후 11시쯤 경기 부천시에서 서울 양천구까지 약 10㎞를 혈중알코올농도 0.182%(면허취소 이상) 상태로 운전한 B씨는 과거 음주운전으로 벌금형 전과가 3회 있었다. 심지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받은 지 두달여 만에 면허증도 없는 상태에서 적발됐다. 이런 조건들을 AI에 입력하자 징역 10개월이 나왔다. 실제로 B씨는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복역중이다.

“AI 양형, 시간 절감…인간 판사는 복잡한 쟁점에”

김명수 대법원장 등 대법관들이 지난해 7월 대법원에서 열린 전원합의체 선고에 착석해 있다. 연합뉴스.

김명수 대법원장 등 대법관들이 지난해 7월 대법원에서 열린 전원합의체 선고에 착석해 있다. 연합뉴스.

26일 ‘AI와 양형’을 주제로 열린 대법원 양형연구회 심포지엄에 참석한 법조계 전문가들은 AI가 판사의 양형 보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데 공감대를 이뤘다. 양형위는 양형 기준을 마련할 때 최근 5년간 선고·확정된 특정 범죄군의 사건을 모(母)집단으로 보고, 양형인자가 될 만한 사정을 고려해 통계 프로그램으로 분석한다. AI도 대량의 데이터를 학습해 통계적으로 추론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뚜렷하다는 것이다.

이날 발제를 맡은 오세용 인천지법 부장판사는 “유사 사건을 검색해 사건별 양형 분포를 파악하는데 시간·노력 절감 효과가 있고, 신속하게 형량 범위를 판단할 수 있어 복잡한 다른 쟁점에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AI가 재판 등에 활용된 국내외 사례도 제시됐다. 민간 리걸테크 기업인 ㈜로이어드컴퍼니가 개발한 ‘AI알법’은 3만건 이상의 판례를 토대로 음주운전·강제추행·사기 등에 대한 형량 예측 서비스를 제공 중이다. 미국의 경우 2013년 2월 위스콘신주 법원이 총격 사건에 사용된 차량을 무단으로 운전해 경찰로부터 도주한 에릭 루미스 사건에서 컴파스(COMPAS)라는 알고리즘을 활용했다. 당시 컴파스가 재범 위험성을 높게 평가하자, 법원은 이를 양형 자료로 참작해 루미스에게 가석방 없는 징역 6년을 선고했다. 유럽 인권재판소의 재판예측 알고리즘이 실제 판결과 79% 일치한다는 점도 소개됐다.

조력자→'판결 기계'는 우려…“AI, 판단과정 설명 못 해”

이상원 양형위원회 위원장이 26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강당에서 'AI와 양형'을 주제로 열린 양형연구회 제10차 심포지엄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뉴시스.

이상원 양형위원회 위원장이 26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강당에서 'AI와 양형'을 주제로 열린 양형연구회 제10차 심포지엄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뉴시스.

그러나 AI가 조력자의 지위를 넘어 단독으로 판결을 내릴 수 있는 ‘판결 기계’로 진화할 수 있는지에 대해선 대다수의 전문가가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김정환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AI가 내린 결과에 대해 피고인 등이 이의를 제기할 경우 합리적인 판단 근거와 논리를 설명할 수 없다는 ‘블랙박스’ 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AI가 대량의 데이터를 학습할 순 있어도 판단 결과의 이유를 역추적하는 것은 현재 기술로는 불가능해서다.

김 교수는 “민간 AI와 법원의 AI 판단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는데, 이때 법원 AI가 항상 옳다는 이유도 제시할 수 없을 것”이라며 “구체적인 이유를 제시해야 사법부의 신뢰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 부장판사도 “시대정신의 변화에 따라 판례를 바꿔야 하는 경우, 인공지능은 과거 자료를 토대로 판단하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AI가 기존 데이터의 편견까지 학습해 따라갈 수 있다는 것이다.

“영리 목적 기록 공개도 문제…비언어적 소통은 어떻게”

AI가 학습할 수사·재판 자료를 민간에 공개할 수 있는지도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제시됐다. 이종원 서울중앙지검 검사는 “현재 판결문마저도 일부만 공개되고, 공개된 판결문도 개인정보 부분은 삭제된다”며 “영리 목적으로 AI를 만들어 법원에 팔 목적으로 형사소송 기록을 보겠다는 것은 현행법상 문제”라고 말했다. 이 검사는 또 “피고인·증인의 진술이 법관이 느끼기에 신빙성이 있는지, 어떤 태도였는지 등 비언어적인 부분은 문서화하기 어렵다”며 “숙련된 법조인의 관찰력에 준하는 비언어적 음성인식 분석 기술은 언제쯤 개발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재판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도록 각종 소송기록 공개에 관한 법령·제도를 정비하고, 재판 과정을 촬영·녹음하는 설비 문제에서부터 AI 도입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며 “AI가 어떤 로직으로 결론에 이르렀는지 사고의 흐름을 볼 수 있는 인터페이스를 개발해야 한다”라는 의견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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