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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석천의 컷 cut

슬퍼도 삼각형은 굴러가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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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권석천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

권석천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

영화 ‘슬픔의 삼각형’은 젊은 모델 커플이 협찬으로 부자들의 요트 관광에 끼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이 요트를 지배하는 원칙은 단 하나. 승무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손님에게 “안 돼요”(No)라고 말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다량의 스포일러 있음)

“모두 다 평등하지.” 요트 갑판의 자쿠지(거품 욕조)에서 와인을 즐기던 러시아 졸부의 아내는 승무원에게 자기 대신 자쿠지에 들어오라고 한다. 승무원이 머뭇거리자 “내 요구를 거부하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묻는다. 승무원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엉거주춤 자쿠지에 들어간다.

배가 전복되면서 이 위선의 세계도 전복된다. 섬에 표류해 살아남은 이들은 평등해질 수 있을까? 답은 ‘아니오’다. 사람들 위에 새로운 인물이 군림한다. 물고기 잡고 불을 피울 수 있는 능력자. 요트에선 눈에 띄지도 않던 중년의 여성 청소직원이다. 그녀가 묻는다. “나는 배에서는 화장실 담당이었지만 여기에선 캡틴이죠. 내가 누구라고요?”

컷 c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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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구라고요?”라는 물음이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자신의 리더십을 인정하게 만드는 데서 모든 권력은 완성된다. 그녀에게 저항하려던 몸짓도 잠시. 사람들은 ‘굶으면 죽는다’는 진리 앞에서 그녀의 권력을 받아들인다. “캡틴이요.” “네. 캡틴….”

‘슬픔의 삼각형’은 인상을 쓸 때 미간에 생기는 주름살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지만 슬픔이 삼각형인 이유는 인간이 권력과 욕망, 생존의 삼각 틀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 아닌가. 삼각형은 뒤집혀도 삼각형 아닌가. 우린 ‘권력욕이 인간의 본능인지 모른다’는 착잡한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자, 이대로 허무하게 물음을 멈출 순 없다. 다시 이렇게 질문해보자. 그래도 뒤집히는 게 정의 아닐까. 삼각형이 계속 구르면 각이 무디어지고 조금은 둥그렇게 되지 않을까. 뒤집힐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로 꼭지점들이 조심하지 않을까.

권석천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