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안혜리의 시선

새벽 4시 30분, 오늘도 확성기 소음에 잠이 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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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맘상모가 아파트 단지에서 24시간 확성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시위하는 사람은 없고 확성기와 현수막만 보인다. 안혜리 기자

맘상모가 아파트 단지에서 24시간 확성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시위하는 사람은 없고 확성기와 현수막만 보인다. 안혜리 기자

현충일에 종일 두통에 시달리다 자정이 넘어 겨우 잠자리에 들었는데 다음날 새벽 4시 30분쯤 눈이 떠졌다. 확성기 소리가 요란했다. "더 이상 인근 주민들의 불편을 야기하지 말고…어쩌고저쩌고. " 지난달 부처님오신날 연휴부터 시작해 벌써 2주 가까이 계속되고 있는 시위 소음이었다. 내가 사는 아파트가 아니라 도로를 사이에 두고 우리 아파트와 마주 보고 있는 건너편 빌라트 앞이 그 현장인데, 베란다 새시는 물론이고 닫을 수 있는 모든 창문을 다 닫아봐도 집 안으로 뚫고 들어오는 확성기 소음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집시법상 소음 기준(주거 지역 00~07시 55dB 이하, 일반 사무실 소음이 45dB 수준이다) 초과 여부와 무관하게, 신고해봐야 별 소용이 없다는 걸 이미 경험했기에 112는 아예 떠올리지도 않았다.

심야 주거지서 시달린 소음시위
무고한 피해 불구 규제 어려워
심야 집회, 헌법적 권리 아니야

그런데 한편으론 의아했다. 분명 집회라는데 평일 오전 6시 30분이든 휴일 오전 9시 30분이든 출근길에 보면 시위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근조(謹弔)'와 '본 현수막은 집회 허가 등록필하였음 훼손 시 형사처벌을 받습니다'라는 문구가 쓰인 검은색 현수막 세 개, 그리고 인도에 세워둔 확성기만 요란했기 때문이다.
흔히들 집회와 시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지키는 헌법적 권리라고 한다. 하지만 정작 자기주장을 알리겠다는 당사자는 이런저런 핑계로 자리를 지키지도 않으면서 분쟁의 당사자도 아닌 아무 잘못 없는 동네 주민만 편하게 잠들어야 할 심야에조차 소음공해에 시달리도록 방치하는 게 정말로 보장해줄 수밖에 없는 헌법적 권리일까. 아파트 관리사무소와 경찰 등에 확인해보니 4년 전 이곳 주민과의 송사에서 패소한 맘상모(맘 편히 장사하고픈 상인모임)라는 단체 등등이 이름을 올린 집회인데, 이달 하순까지 한 달 동안 하루 24시간 내내 집회 신고가 돼 있어 심야든 새벽이든 맘상모가 내킬 때마다 확성기를 트는 거란다. 맘상모 페이스북 계정에 스스로를 '소유권을 과도하게 보호하는 잘못된 사회와 법, 그리고 약탈하는 건물주들을 바꾸는 활동을 한다'고 소개한 거로 미뤄 짐작할 때 이번 시위는 오랜 분쟁을 겪어온 특정 임대인에 대한 사적 벌주기에 가까운데도 이런 탈법적 행위를 헌법적 권리라며 보장해주고 있는 셈이다.
사실 주택가나 대기업 사옥 앞 소음 시위는 이젠 사람들이 별 관심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워낙 해묵은 문제다. 쉽게 말해, 시위자 권리를 거의 무한대에 가깝게 보호하는 한국만의 강력한 집시법에다 무기력한 공권력이 결합해 지난 10년간 숱한 피해자를 양산한 채 다들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번 주거지 시위에 대해서도 경찰은 "주민이 직접 시설보호 요청과 집단 탄원서를 제출하면 시위 주최 측에 소음을 줄여달라고 요구하는 '제한 통고'를 하고,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추가 집회 신고를 받아주지 않는 '금지 통고'를 할 수 있다"고 했다. 경찰로선 신고가 들어올 때마다 소음 채증을 하긴 하는데 기준을 넘겨봐야 경범죄 처벌이 전부고, 신고된 집회 기간 내엔 막을 방법이 없다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사저 인근 시위 소음에 대한 불편을 호소하자 경찰은 경호 구역 확장 방식으로 시위를 막았다. 경호 구역 확장 첫날인 지난해 8월 평산마을 도로에서 경찰과 시위자들이 대치하는 모습. 뉴스1

문재인 전 대통령이 사저 인근 시위 소음에 대한 불편을 호소하자 경찰은 경호 구역 확장 방식으로 시위를 막았다. 경호 구역 확장 첫날인 지난해 8월 평산마을 도로에서 경찰과 시위자들이 대치하는 모습. 뉴스1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마침 여당인 국민의힘이 지난달 '자정부터 오전 6시까지 심야 집회시위를 금지하는 법률 개정을 추진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시민들 눈살 찌푸리게 했던 건설노조 노숙집회가 직접적 계기가 됐지만 가장 먼저 그 혜택을 볼 사람들은 평안해야 할 거주지에서 소음에 시달리느라 최소한의 행복권마저 침해당한 평범한 사람들이 될 게 분명하다. 그런데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윤석열 정부가) 집회의 자유마저 박탈하겠다는 위헌적 발상"이라며 "집회 때문에 수출이 무너졌나. 민생이 무너졌나. 민주주의가 파괴됐나. 무슨 문제가 생겼느냐"고 거세게 반발했다. 이른바 진보를 표방한 친노조 언론들도 비슷한 비판을 쏟아냈다. 아무리 내로남불이 민주당의 전매 특허라고는 하지만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이 퇴임 후 양산 사저에서 집회 소음에 시달릴 땐 전직 대통령 사저 인근 집회 자체를 아예 금지하는 집시법 개정안까지 발의해놓고, 심야라도 좀 조용히 쉬고 싶다는 시민의 작은 바람을 담은 법안에는 위헌적 발상이라고 비판하니 좀 어이가 없다. 사저 시위를 놓고 "법에 따르자"던 윤석열 대통령 발언에 당시 민주당 대변인은 "퇴임한 자연인에 대한 폭력적 테러(를 막지 않는) 옹졸함의 극치"라고 거세게 반발하더니, 이제 보니 모든 국민은 평등한데 내 편 전직 대통령은 특별히 더 평등하다는 말이었나 보다.
참고로, 친노조 언론들이 헌법적 권리라며 소환한 지난 2014년 헌재의 야간 집회 금지 위헌 판단은 해가 진 후부터 같은 날 24시까지의 시위였다. 그때도 0시 이후 필요한 규제는 국회의 입법판단에 맡겼다.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