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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기찬의 인프라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규정에도 노조는 회사 부담 당연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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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김기찬
김기찬 기자 중앙일보 고용노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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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서울교통공사 노조의 일부 간부가 출근도 안 하고 임금만 챙긴 사실이 불거져 논란이다. 근로시간면제제도(이하 타임오프)를 악용하면서다. 다른 사업장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나오고 있다.

고용노동부가 결국 타임오프 운영 실태 조사에 착수했다. 1000인 이상(510개소), 대기업 노조가 타깃이다. 고용부 관계자는 “자체 재정으로 자립이 가능하면서 노조의 힘이 센 곳”이라고 말했다. 고용부는 우선 사용자를 대상으로 초벌 조사를 한 뒤 그 결과를 분석해 현장 조사 등 후속 조치에 나설 방침이다.

 한국 노조 “임금 지급 대상 확대”
선진국 노조 “자주성 침해” 경계

“자체 부담이 가능한 대기업은
타임오프 중단, 자립 유도하고
중소기업은 한시적 전환해야”

2000년 7월 지역의료보험 노조원들이 건강보험공단 이사장실에 난입해 이사장의 뺨을 때리고 기물을 부수는 등의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당시 사건을 보도한 TV화면 캡처.

2000년 7월 지역의료보험 노조원들이 건강보험공단 이사장실에 난입해 이사장의 뺨을 때리고 기물을 부수는 등의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당시 사건을 보도한 TV화면 캡처.

고용부가 타임오프 실태를 들여다보자 노동계는 반발하고 있다. 노동계는 타임오프 확대를 요구해왔다. 회사에서 돈을 대는 노조전임자를 더 늘리라는 얘기다.

원래 노조는 그 개념상 사용자로부터 자주성을 확보해야 한다. 노조 업무만 보는 전임자의 임금을 노조가 부담하는 것은 이런 이치에서다. 외국에선 노조전임자가 임금은 물론 그 어떤 혜택도 회사에 기대지 않는다. 회사가 임금을 주겠다고 나서면 ‘노조 탄압’ ‘자주성 훼손’이라며 극도로 경계한다.

노조 전임자 급여 지급 되레 늘어

어찌 된 일인지 한국은 딴판이다. 전임자 급여를 회사에서 거리낌 없이 받고, 당연하게 여긴다. 이런 불합리한 관행을 지속하다 못해 타임오프를 개선하려 하자 “국제노동기구(ILO) 협약 위반”이라며 회사가 계속 돈을 대라고 한다. 노사가 합의해서 주기 때문이란다. 몇 해 전 독일 자동차 회사 노조 관계자가 “진짜냐”고 되물을 정도로 외국 노조가 볼 땐 어이없는 주장이다.

이런 관행을 바로잡으려 1997년 ‘노조전임자 급여 지급 금지’ 규정을 노조법에 신설했다. 하지만 노동계 반발에 막혀 13년 동안 시행이 미뤄졌다. 희한한 건 시행유예 기간 동안 노사 자율로 전임자를 축소하도록 했는데, 오히려 늘어났다는 점이다. 법이 거꾸로 작동됐던 셈이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한편으론 전임자 급여 지급 금지에 따른 중소규모 노조의 위기설도 나왔다. 복수노조가 허용된 상황에선 조합원 분산으로 노조의 재정이 더 취약해져 위축될 것이라는 걱정이다.

이에 따라 노사정이 협의해 2009년 전임자 급여 지급 금지 규정을 그대로 두고, 완충형으로 근로시간면제제도를 도입했다. 노사 공동의 이해관계에 속하는 노조의 활동, 즉 교섭, 협의, 고충처리, 산업안전 등의 업무를 하는 전임자에게 회사가 예전처럼 월급을 주도록 했다. 다만 조합원 수에 따라 임금을 받으면서 노조 업무를 볼 수 있는 시간을 제한했다. 조합원 규모가 99명 이하인 노조에 연간 최대 2000시간, 1만5000명 이상이면 최대 3만6000시간만 일하지 않아도 임금을 주는, 즉 근로시간을 면제해주는 식이다. 한국에만 있는 독특한 회사의 노조 운영 개입이지만, 불합리한 관행 개선의 첫발을 떼려는 고육책이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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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제도는 잘 지켜지고 있을까.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2021년 노사를 대상으로 타임오프 실태조사를 벌였다. 그랬더니 타임오프 도입 이후 풀타임과 파트타임 전임자가 모두 늘어나는 이상한 현상이 발견됐다. 풀타임 전임자는 1.32명에서 1.63명으로, 부분 전임자는 0.57명에서 1.83명으로 증가(회사 집계)했다. 공식적으로 회사가 돈을 대도록 하니 인원이 불어나는 상황이 초래된 것이다.

한국 전임자 수, 유럽의 7.5배

고용부에 따르면 우리나라 노조전임자는 7500명 안팎이다. 전임자 1명당 평균 조합원 수는 200명 정도다. 부분 전임자까지 포함하면 조합원 170여 명당 1명꼴이다. 일본이 조합원 600명, 미국이 1000명, 유럽이 1500명당 전임자가 1명인 것에 비하면 ‘일하지 않는 노조 간부’가 지나치게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타임오프도 늘고 있다. 단체협약으로 정해진 2021년 전 사업장 평균 근로시간 면제 시간은 4255시간이다. 2013년 조사 때(3736시간)보다 13.9%포인트 증가했다. 조합원 5000인 이상 사업장에선 23.5%p(5453시간)나 늘었다. 50인 미만 사업장도 32.4%p 늘었지만, 증가분은 381시간에 불과하다. 대기업에선 한도를 넘긴 곳도 발견됐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는 “수 백억원의 재정을 보유한 현대차와 같은 대기업 노조가 회사에서 월급을 받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그러면서 파업을 하니, 사용자측으로선 돈을 퍼주고 뺨 맞는 꼴”이라고 말했다.

노사가 협의해서 정한 면제 시간은 50인 미만 사업장의 경우 법에 명시된 면제 한도 대비 74.9%~77.9% 선인 것으로 파악됐다. 반면 5000인 이상 사업장은 100%가 넘었다. 특히 실제 사용한 면제시간도 50인 미만은 정해진 시간의 45.9%만 썼고, 50~99인은 65.8% 수준이었다. 1000인 이상 사업장은 97.8~100% 사용했다. 대기업 중심 노동운동을 방증하는 통계다.

타임오프제는 노조 부담 원칙을 확립하기 위한 징검다리 제도다. 그렇다면 노조가 재정 건전성을 꾀하는 게 순리다. 한데 타임오프제가 도입된 뒤 조합비를 인상한 곳은 7.1%, 재정 확충 사업을 한 곳도 18.4%에 그쳤다.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타임오프는 지속가능하지 않은 과도기적 제도”라고 말했다. 권 교수는 “자립이 가능한 노조(대기업)가 타임오프를 하는 것은 노조의 개념이나 기능적 측면에서 맞지 않다”며 “타임오프는 노조에 추가 혜택을 주는 제도가 아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