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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외교관 가족 실종"…송환 뒤 질책 우려한 '탈북 러시' 가능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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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연해주 '실종자 소식' 전단에 공개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북한 외교관의 가족 김금순(43)씨와 박권주(15)씨. 사진 RFA 캡처

북한 연해주 '실종자 소식' 전단에 공개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북한 외교관의 가족 김금순(43)씨와 박권주(15)씨. 사진 RFA 캡처

러시아 극동 도시인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북한 총영사관 소속 직원의 가족 2명이 실종돼 현지 수사 당국이 소재 파악에 나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차단을 위해 중국 및 러시아와의 국경을 봉쇄한 북한이 조만간 국경을 개방할 거란 전망이 잇따르면서 해외에 상주하던 북한 인력들이 본국 송환을 거부하며 이탈이 가속화하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은 6일(현지시간)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북한 총영사관에서 근무하는 박모 씨의 아내인 김금순(43) 씨와 아들 박권주(15) 군이 지난 4일 실종됐다고 보도했다.

북한 총영사관은 이들 모자와 연락이 닿지 않자 러시아 당국에 실종 신고를 했고, 러시아 현지 언론은 6일 관련 내용이 담긴 실종자 전단을 공개했다. 연해주 '실종자 소식' 전단에도 '사람을 찾습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이들의 사진과 나이(1980년생·2008년생), 인상착의 등이 담겼다. 마지막 부분에는 "이 사람의 행방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아래(경찰)로 전화바람"이라는 문구가 포함됐다.

북한 당국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운영하다 문을 닫은 고려관의 모습. 사진 강동완 동아대 교수

북한 당국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운영하다 문을 닫은 고려관의 모습. 사진 강동완 동아대 교수

보도에 따르면 김씨와 아들 박군은 휴대전화를 소지하지 않은 채 지난 4일 택시를 타고 북한 총영사관 인근에 있는 '넵스카야 거리'에서 내린 뒤 연락이 끊겼다. 반면 북한 총영사관 무역대표부 소속인 외교관 박씨는 가족들과 함께 움직이지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RFA는 이들이 북한 국경이 개방되기 전에 서둘러 탈북을 감행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을 내놨다. 최근 블라디보스토크에선 블라디보스토크와 평양 사이를 오가는 항공편이 열린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항공편 재개는 코로나 등으로 이어졌던 오랜 해외 생활을 끝내고 북한으로 귀국하게 될 가능성이 커졌음을 의미한다. 실종된 모자 역시 북한으로 돌아가는 대신 탈북을 선택했을 수 있다.

최근 블라디보스토크를 찾았던 강동완 동아대 교수는 7일 중앙일보에 "러시아 현지 정보지에 실종 소식이 게재됐다는 것은 실종자들이 탈북을 감행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과거에도 북한 영사관은 자신들이 관리하던 노동자들이 탈북하는 경우 이런 방식으로 사진을 공개해 수배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말했다.

지난 4월 20일 저녁 블라디보스토크 중심가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위치한 북한 노동자 숙소에서 포착된 TV의 모습. 화면에선 조선중앙TV의 로고와 북한군의 시원으로 삼는 조선인민혁명군(항일 빨치산)관련 이야기를 담은 '주체혁명의 첫 기슭에서'라는 소개편집물의 제목이 확인됐다. 사진 강동완 동아대 교수

지난 4월 20일 저녁 블라디보스토크 중심가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위치한 북한 노동자 숙소에서 포착된 TV의 모습. 화면에선 조선중앙TV의 로고와 북한군의 시원으로 삼는 조선인민혁명군(항일 빨치산)관련 이야기를 담은 '주체혁명의 첫 기슭에서'라는 소개편집물의 제목이 확인됐다. 사진 강동완 동아대 교수

북한은 '외화벌이'를 위해 중국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상당한 규모의 불법 해외 파견 노동자들을 활용하고 있다.

그런데 해외 파견 인력들은 북한 정권의 주요 '돈벌이'의 수단인 동시에, 차단된 정보가 아닌 외부 세계의 진실을 알게 된 '위험 요인'이기도 하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의 해외 파견자를 '양날의 검'에 비유하며 "김정은 정권의 통치 자금을 벌어들이는 핵심 '돈줄'이지만, 북한으로 귀국한 뒤에는 일반 주민들에게 소위 '자본주의 날라리풍'을 전달하는 주요 루트가 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북한 당국은 해외 파견자들에게 의무적으로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영상물을 시청하게 하는 등 '사상 단속'을 통한 이탈 방지에 주력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럼에도 코로나 상황으로 '장기 해외 파견'을 통해 북한 사회의 모순을 깨닫게 된 북한 인력들이 국경 봉쇄 해제를 앞두고 탈북을 감행하는 사례가 드물지 않게 보고되고 있다. 지난 3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 내 북한 식당인 '고려관'의 부지배인이 탈북을 시도하다 체포됐고, 지난해 11~12월에는 러시아 각지에 파견됐던 북한 노동자 9명이 집단으로 탈북해 국내에 입국하기도 했다.

북한 노동자들이 지난 4월 말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도심에 있는 대형 공사현장에서 골조공사를 하는 모습. 사진 강동완 동아대 교수

북한 노동자들이 지난 4월 말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도심에 있는 대형 공사현장에서 골조공사를 하는 모습. 사진 강동완 동아대 교수

특히 북한 외교관들의 경우, 장기 국경 봉쇄 기간의 실적 부진과 당국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던 기간 벌어졌던 각종 스캔들 등으로 북한 귀국 이후 강한 문책을 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도 노출돼 있다. 실제 최근 북한전문 매체 등을 통해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영사관 직원들이 북한 식당에서 한밤중까지 유흥을 즐기는 정황, 영사관 직원 가족들이 관용차로 현지 백화점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는 장면 등이 공개되기도 했다.

익명을 원한 대북 소식통은 "무역대표부에서 파견된 박모 씨의 경우 블라디보스토크 내 부지점장 탈북 시도가 발생했던 북한식당 운영 등과 관련된 문제에 책임을 져야 할 위치"라며 "본국 송환 뒤 식당 운영 실적에 대한 질책과 함께 인력 관리 소홀에 대한 책임까지 떠안게 된 상황에서 가족들을 급하게 제3국 등으로 보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실제 북한 전문매체인 데일리 엔케이(Daily NK)는 현지 소식통을 인용해 "중국의 코로나 상황이 해소 국면으로 접어들면 중국에 3년 이상 체류하고 있던 무역기관 간부들이 평양으로 송환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며 "이들은 송환 이후 상황에 대한 상당한 부담감을 호소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오경섭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국경 봉쇄가 장기간 이어지면서 본국 송환을 앞둔 해외 파견 인력들의 동요가 심해지는 모습"이라며 "북한 당국이 탈북 방지를 위해 사상 교육 등을 강화하고 있지만, 이들의 이탈을 근본적으로 막기는 어렵기 때문에 국경 개방을 앞둔 해외 북한 인력들의 이탈이 확대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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