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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전 드러난 팩트, 13년째 떠도는 천안함 음모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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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천안함 자폭" 발언을 했던 이래경 더불어민주당 혁신기구 위원장이 논란 끝에 사퇴했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여전히 정치 논리에 휘둘리고 있는 안보 현실이 재확인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13년째 음모론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천안함 피격뿐 아니라 고고도미사일방어(사드·THAAD) 체계, 대북 전단 등 굵직한 안보 현안이 매번 진영 프레임에 갇히고, 이를 중재해야 할 정치권이 오히려 갈등을 부추기면서 국가의 안보 기반을 갉아먹고 있다는 지적이다.

 제68주년 현충일인 6일 국립대전현충원 천안함46용사합동묘역에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유가족과 참배객의 발길이 이어지는 모습. 프리랜서 김성태

제68주년 현충일인 6일 국립대전현충원 천안함46용사합동묘역에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유가족과 참배객의 발길이 이어지는 모습. 프리랜서 김성태

13년 전 '北 폭침' 밝혔는데…

지난 5일 민주당 혁신기구 위원장으로 임명됐던 이래경 '다른백년' 명예이사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자폭된 천안함 사건을 조작해 남북 관계를 파탄 낸 미 패권 세력들”이라고 썼던 전력이 드러나면서 임명 9시간 만에 사퇴했다. 그는 2017~2018년 언론 기고에서도 "이명박 정권이 천안함 침몰을 북한의 소행으로 일방적으로 몰았다", "북한에 의한 폭침이라는 것은 일방적 수준의 허무맹랑한 망언"이라고 주장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5일 더불어민주당 쇄신을 이끌 혁신기구 위원장에 임명됐다 9시간만에 사퇴 의사를 밝힌 이래경(69) 다른백년 명예이사장의 지난 2월 페이스북 게시글. 사진 페이스북 캡처.

5일 더불어민주당 쇄신을 이끌 혁신기구 위원장에 임명됐다 9시간만에 사퇴 의사를 밝힌 이래경(69) 다른백년 명예이사장의 지난 2월 페이스북 게시글. 사진 페이스북 캡처.

제1야당의 '미래'를 책임지려던 이 이사장을 통해 재차 불거진 천안함 관련 논란은 이미 13년 전에 명확하게 결론이 났던 사안이다.

2010년 한국을 비롯해 미국ㆍ영국ㆍ호주ㆍ스웨덴의 5개국 전문가 등 70여 명으로 구성된 민군 합동조사단은 3개월간의 조사를 거쳐 국군 46명의 목숨을 앗아간 천안함 침몰의 원인을 '북한 잠수정의 어뢰 공격'으로 결론냈다. 군 당국은 북한의 소행을 입증하는 '스모킹 건'으로 북한의 어뢰 표기 방법에 따라 '1번'이라는 손글씨가 적힌 어뢰추진체까지 인양해 확인했다.

2010년 합동조사단은 천안함이 피격된 해저에서 건져올린 어뢰추진체에 1번이라는 파란색 손글씨가 적혀있다는 점을 북한의 어뢰 공격을 입증할 증거 중 하나로 제시했다. 중앙포토

2010년 합동조사단은 천안함이 피격된 해저에서 건져올린 어뢰추진체에 1번이라는 파란색 손글씨가 적혀있다는 점을 북한의 어뢰 공격을 입증할 증거 중 하나로 제시했다. 중앙포토

그런데도 13년째 좌초설, 미군 오폭설, 유실기뢰설, 암초 충돌설 등 각종 음모론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배경으론 갈등을 정치적 목적으로 악용하는 정치권과, 이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처해온 정부의 태도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정치권과 정부가 나선 '2차 가해' 

특히 지난 정부에선 국립외교원장이 천안함 '폭침'이나 '피격'이 아닌 '침몰'이란 표현을 쓰거나, 통일부 장관 후보자가 천안함 피격을 "우발적 사건"이라고 규정하면서 논란을 오히려 증폭시키기도 했다.

특히 당시 정부는 2020년엔 북한의 소행으로 이미 결론 난 천안함 사건에 대해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차원의 재조사를 추진하기도 했다. 이듬해인2021년엔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천안함 좌초설 등을 제기한 유튜브 영상에 '문제가 없다'는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이 때문에 최원일 전 천안함 함장 등 생존 장병 34명이 신형 천안함 진수식에 항의의 의미로 불참하기도 했다

사실상 정부 차원에서 과거 정부 때 이뤄진 조사를 불신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소지가 큰 이러한 움직임은 천안함 유족과 생존 장병들의 거센 반발과 극심한 사회적 혼란을 초래했다. 실제 전 정부 때 이뤄진 재조사 결정에 대해 2년 뒤 감사원은 "부당한 결정이었으며 불필요한 논란을 야기했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2010년 천안함 피격 사건에서 전사한 고 민평기 상사 어머니 윤청자 여사가 지난해 6월 중앙일보와 단독 인터뷰를 하며 아들의 사진을 들어보이는 모습. 프리랜서 김성태

2010년 천안함 피격 사건에서 전사한 고 민평기 상사 어머니 윤청자 여사가 지난해 6월 중앙일보와 단독 인터뷰를 하며 아들의 사진을 들어보이는 모습. 프리랜서 김성태

특히 천안함 관련 음모론의 끝없는 확대·재생산은 유족들에 대한 '2차 가해'가 되고 있다.

'천안함 46용사' 중 한 명인 고(故) 민평기 상사의 어머니 윤청자(79) 여사는 이래경 이사장의 "천안함 자폭" 발언이 알려진 뒤 중앙일보에서 울음을 터뜨리며 "나라 지키다 간 애들을 왜 아직도 그렇게 매도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다"고 했다. 이 여사는 이어 "분하고 원통하고 억울하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민 상사의 형 민광기(53)씨도 "북한에 포섭된 게 아니고서야 자기 생명과 목숨을 지키려다 희생한 사람들을 어떻게 폄하할 수 있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김형준 배재대 석좌교수는 "야당이 천안함 피격 사건처럼 한국의 국가 안보와 정체성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도 국익을 위해 초당적 대응을 하지 못하고, 진영 논리에 지배돼 안보를 병들게 하고 국민을 분열시키는 모양새"라며 "특히 북한의 도발을 은폐하기 위해 괴담에 가까운 음모론을 퍼뜨려 지지층은 물론이고 중도적 성향의 대중의 인식까지도 바꾸려고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3월 국립대전현충원에서 거행된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서 고 민평기 상사 어머니 윤청자 여사가 아들이 안장된 천안함46용사묘역을 찾아 오열하는 모습. 프리랜서 김성태

지난해 3월 국립대전현충원에서 거행된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서 고 민평기 상사 어머니 윤청자 여사가 아들이 안장된 천안함46용사묘역을 찾아 오열하는 모습. 프리랜서 김성태

외교 분야 곳곳에 음모론 

특히 국내 외교·안보 분야에선 천안함 피격 외에도 대북 전단, 사드 논란 등과 관련한 끊임 없는 음모론은 선동성 주장으로 이어지면서 국론 분열을 부추기고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특히 정치적 양극화로 양 진영 모두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겠다'는 태도가 강화된 상황에서 정치권과 정부가 '갈등의 불씨'에 기름을 붓고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2020년 12월 당시 통일부가 주한 외국 공관 등에 배포한 대북전단금지법 관련 자료에는 "일부 탈북자들이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묻힌 물품을 살포해 북한에 코로나 19를 확산시키려 한다며 북측이 강력 반발한 사례도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는 '남측이 날린 대북 전단 때문에 코로나 유입됐다'는 괴담에 가까운 북한의 주장과 유사하다. 이에 앞서 민주당 의원들은 사드에 대해서도 "강력한 전자파 밑에서 몸이 튀겨진다" 등의 가사가 담긴 노래를 공개적으로 부르기도 했다.

2017년 8월 정부가 경북 성주군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부지 내에서 전자파와 소음을 측정하는 모습. 중앙포토

2017년 8월 정부가 경북 성주군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부지 내에서 전자파와 소음을 측정하는 모습. 중앙포토

정치권이 국가 안보와 관련한 사안에 대해서도 선동에 가까운 태도로 일관하면서, 정작 대북 전단이나 사드 등 주요 안보 사안은 정치적 이해득실 차원에서만 다뤄졌을 뿐 건설적이고 심도 있는 논의는 지금까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성훈 전 통일연구원장은 "안보는 국가라는 집을 짓기 위해 반드시 탄탄하게 다져야 할 기반과도 같이 소중한 것이므로 정치 논리에 따라 흔들려선 안 된다"며 "한반도가 핵위기에 직면한 상황에서 정치권은 더는 안보를 정쟁의 희생양으로 삼지 말고, 객관적인 팩트를 토대로 북한 위협의 실체를 직시하고 국론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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