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88세 최고령 리어왕 이순재…미치광이 노인 완벽 연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0면

연극 ‘리어왕’에서 리어왕 역의 이순재가 두 딸에게 속아 모든 것을 잃고 실성한 채 광야를 떠도는 장면을 연기하고 있다. 사진 연우무대·에이티알

연극 ‘리어왕’에서 리어왕 역의 이순재가 두 딸에게 속아 모든 것을 잃고 실성한 채 광야를 떠도는 장면을 연기하고 있다. 사진 연우무대·에이티알

“개나 말이나 쥐 같은 것도 생명이 있는데, 너는 왜 숨이 없느냐? 너는 이 세상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결코, 결코, 결코, 결코, 결코!”

모든 것을 잃은 리어왕은 막내딸 코딜리아를 끌어안고 이렇게 절규한다. 리어왕의 목소리는 현실이 믿기지 않는 듯 건조하지만 눈빛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거두어 달라 외치는 듯 절절했다. 지난 2일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에서 배우 이순재(88)가 선보인 ‘리어왕’은 그의 66년 연기 인생을 응축한 듯 인간의 희로애락을 담고 있었다.

이날 공연은 개막 2일 차 프리뷰였음에도 이순재는 안정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그는 절대 군주에서 미치광이 노인으로 전락한 리어왕의 심리를 세심하게 표현했다. 아들에게 속아 두 눈을 잃게 되는 글로스터 백작 역의 최종률, 사탕발림으로 리어왕의 유산을 차지하는 맏딸 고너릴 역의 권민중과 둘째 딸 리건 역의 서송희 등 조연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했다. 충신 켄트 백작 역의 박용수는 특유의 여유있고 안정적인 발성으로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순재는 연극 제작사 연우무대·에이티알을 통해 “리어왕은 그 작품 안에 이 세상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평가를 받는 수작”이라며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함께 시도해 볼 수 있는 최고의 행운이기에 자다가도 대사가 튀어나올 수 있을 정도로 철저히 준비했다”고 밝혔다. 실제 2일 공연에서 그는 완벽에 가까운 대사 소화 능력을 보여줬다. 다만 그의 발음이 분명치 않아 일부 대사를 듣지 못했다는 평과 LG아트센터의 음향이 고르지 못했다는 평도 있다.

2021년 서울 예술의전당 공연에 이어 두 번째로 무대에 오른 이순재 주연의 ‘리어왕’은 셰익스피어 원작을 각색하거나 압축하지 않고 그대로 살렸다. 가장 권위 있는 정전본으로 꼽히는 셰익스피어 사후 7년 차(1623) 버전을 번역해 대본으로 썼다.

번역을 맡은 이현우 순천향대 영미학과 교수(셰익스피어학회장)는 “산문 위주인 기존 번역본과 달리 원작의 운문은 운문 그대로, 산문은 산문으로 구분해 번역했다”며 “운문을 번역할 때는 말의 맛을 살리기 위해 시의 기본이 되며 판소리에서도 흔히 사용되는 3, 4 음보 등을 활용했다”고 했다.

러닝타임 3시간20분 동안 고어(古語) 투의 대사가 이어지지만, 광대와 하인 오스왈드 등 감초 배우들의 코믹한 연기가 곳곳에 배치돼 있어 지루하지 않다. 또 고어로 이뤄진 대사가 오히려 웃음 포인트가 되기도 한다. 맏딸 고너릴에게 배신당한 리어왕이 “이 돌의 마음을 가진 악마야!”라며 독설을 퍼붓는 장면에서도 객석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긴 독백을 속사포 같이 쏟아내는 리어왕의 정성스럽고도 문학적인 저주가 다소 코믹하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공연이 끝나자 관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배우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박수를 보냈다.

이번 공연은 오는 18일까지 16회만 진행한다. 이순재는 공연 직후 ‘최고령 리어왕’으로 기네스북에 오를 예정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