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尹 "피 묻은 전투복서 자유 시작"…유족 "살다 보니 이런 날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6일 오전 10시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현충원 앞.

검은색 양복 차림의 윤석열 대통령이 현충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나가자 뒤로 8명의 낯선 이들이 따라 걸었다. 방송에선 이들에 대해 “6·25 전사자 유족이신 김성환님·이천수님·전기희님·고영찬님과 국토방위와 국민의 편안한 일상을 위해 근무하다 순직하신 군인, 경찰, 소방, 해양경찰의 유족이신 이준신님·이꽃님님·박현숙님·황상철님”이라고 소개했다. 입장하는 이들의 옆에는 ‘대한민국을 지켜낸 당신의 희생을 기억합니다’라는 문구가 걸려 있었다. 제68회 현충일 추념식은 이렇게 시작됐다.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6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제68회 현충일 추념식에 참석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6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제68회 현충일 추념식에 참석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이날 윤 대통령의 추념사를 관통한 건 기억과 예우였다. 9분간의 추념사에는 ‘영웅’·‘자유’(8회), ‘기억’(6회), ‘예우’(4회) 등이 등장했다.

이들 단어 앞에는 6·25가 많이 자리했다. 6·25 전사자 12만 1817명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의 ‘121879 태극기 배지’를 단 윤 대통령은 “저는 오늘 추념식에 앞서 고(故) 김봉학 육군 일병의 안장식에 참석했다”고 했다. 김 일병은 1951년 9월 국군 5사단과 미군 2사단이 협력해 북한군 2개 사단을 격퇴한 강원도 양구군 ‘피의 능선’ 전투에서 전사했다. 윤 대통령은 “그때의 치열한 전투상황을 알려주듯 고인의 유해는 2011년부터 2016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서로 떨어진 곳에서 발굴됐다”며 “고인의 유해는 올해 2월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고, 춘천지구 전투에서 앞서 전사한 동생 고(故) 김성학 육군 일병의 묘역에 오늘같이 안장했다”고 소개했다. 두 형제가 6·25 전쟁에 참전한 지 73년 만에 유해로 상봉한 것이다. 대통령실은 이들을 ‘호국 형제’로 명명했다. 윤 대통령은 “정부는 호국 영웅들께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끝까지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서 강조한 게 대북 안보 강화였다. 지난해 추념사에서 “북한의 핵 위협을 억제하면서, 보다 실질적인 안보 능력을 갖추어 나갈 것”이라고 약속했던 윤 대통령은 올해에는 “한·미동맹은 이제 핵 기반 동맹으로 격상됐다”고 평가했다. 지난 4월 국빈 방미를 계기로 미 핵 자산의 확장 억제 실행력을 획기적으로 강화하는 ‘워싱턴 선언’을 공동 발표한 것을 언급하며 한 말이었다. 윤 대통령은 “우리 정부와 군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철통 같은 안보 태세를 구축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겠다”고 했다.

 이는 북한과의 대화를 강조했던 문재인 전 대통령과도 차별되는 대목이다. 문 전 대통령의 5년간 현충일 추념사를 보면 주로 첫머리에 ‘독립운동가·항일운동·광복군’이 등장했고, 6·25 전쟁을 두곤 북한 정권에 날을 세우기보다는 “전쟁의 비극” 등 모호하게 표현하곤 했다. 이에 반해 윤 대통령은 “대한민국은 공산 전체주의 세력에 맞서 자유를 지켜내신 분들의 희생과 헌신 위에 서 있다”며 국가 정체를 명확히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6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제68회 현충일 추념식에서 추념사를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윤석열 대통령이 6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제68회 현충일 추념식에서 추념사를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윤 대통령은 보훈정책 강화에도 힘을 실었다. 지난해 추념사에서 언급했던 “확고한 보훈 체계” 약속은 올해 “어제 국가보훈처가 국가보훈부로 승격되었다. 더 잘 살피고 예우할 것”이라는 말로 이어졌다. 이날 추념사에서 윤 대통령은 “국가의 품격은 국가가 누구를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달려있다”며 “자유민주 국가를 건설하고 수호하신 분들, 나라의 주인인 국민의 안전을 위해 희생하신 분들을 제대로 기억하고 예우하는 것은 우리 자유민주주의 헌법의 실천 명령”이라고 말했다.

한편 추념식에 앞서 고(故) 김봉학 일병 유해 안장식에 참석한 윤 대통령은 유가족들의 손을 잡고 감사와 위로의 말을 전했다고 이도운 대변인은 전했다. 이에 유가족들은 “큰형님(고 김봉학)이 어두운 곳에 계속 계셨는데, 이제 밝은 곳으로 나왔으니 두 형제가 손 꼭 잡고 깊은 잠을 드실 수 있을 것 같다”며 “대통령께서 직접 축하해 주시니 두 분이 좋은 곳으로 가실 것”이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추념식 뒤엔 예정에 없던 베트남전 및 대간첩 작전 전사자 묘역도 방문했다. 먼저 베트남 파병 장병이 묻힌 묘역을 찾아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의 부친인 고(故) 박순유 육군 중령, 고(故) 박용재 육군 대위의 묘소를 참배했다. 이어서 대간첩 작전 전사자 묘역을 찾아 고(故) 이상현 해병 상병의 묘소를 참배하고 유가족을 위로했다. 이상현 상병은 1972년 진해에서 초소근무 중 무장공비와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베트남전 및 대간첩 작전 전사자 묘역이 있는 제3 묘역은 1981년 6월 조성됐는데, 현직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한 것은 42년 만에 처음이다.

 윤 대통령은 참배 온 유족에게 “전사한 영웅들과 좋은 말씀 많이 나누시라”, “대한민국의 자유와 번영은 전사하신 분들의 피 묻은 전투복 위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했다. 이에 유족들은 “살다 보니 이런 날이 오네요”라며 감사를 표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