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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박정희 쿠데타로 첫 의원직 3일만에 상실… 18년 악연 시작-김대중 육성 회고록〈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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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김대중 육성 회고록 〈4〉

4전5기(四顚五起). 나, 김대중(DJ)은 1961년 5월 13일 강원도 인제에서 실시된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민의원)에 당선됐다. 목포(54년)와 인제(58·59·60년)에서 연거푸 네 번 고배를 마신 뒤 다섯 번째 도전에서 성공, 첫 금배지를 달게 됐다. 천신만고 끝에 붙잡은 ‘37세 국회의원 김대중’의 미래를 그리며 행복한 고민에 푹 빠져 있었다.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에서 목포에 무소속으로 첫 출마했으나 낙선했다(앞줄 왼쪽에서 넷째). 이후 4전 5기 끝에 61년 인제에서 처음 당선됐다.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에서 목포에 무소속으로 첫 출마했으나 낙선했다(앞줄 왼쪽에서 넷째). 이후 4전 5기 끝에 61년 인제에서 처음 당선됐다.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당선 사흘째 되던 날, 날벼락이 떨어졌다. 군인들이 서울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소식이었다.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5·16 군사정변이었다. 군사혁명위원회가 ‘의회 해산’ ‘내각 인사 체포’ 등 포고령을 발표하고, 대한민국의 전권을 접수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급거 상경했지만, 금배지는커녕 의사당에 발도 못 디뎌보고 의원직을 상실했다. ‘정치 활동 금지자’에도 묶여 사실상 백수로 전락했다. “정치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꿈이 신기루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9년 전 정계 투신을 결심한 이후 겪은 시련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정계 뛰어들게 한 ‘부산 정치 파동’

김대중 전 대통령(앞줄 왼쪽에서 첫째)이 1950년대 목포와 부산을 오가며 해운업에 종사하던 시절.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김대중 전 대통령(앞줄 왼쪽에서 첫째)이 1950년대 목포와 부산을 오가며 해운업에 종사하던 시절.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52년, 나는 정치·경제의 중심이 된 임시 수도 부산에 살았다. 사업상 전남 목포에서 운영하던 해운사업을 부산으로 옮겨 곡물·비료·가마니 등을 실어 날라 꽤 번창했다. 그때만 해도 사업가로서 성공하는 게 인생 목표였다.

부산은 세상을 향해 새롭고 넓은 눈을 뜨게 했다. 부산 영도에 머물던 죽산 조봉암(1898~1959)을 찾는 등 정치적 성향의 다양한 인사들과 교류하며 정치에 비상한 관심을 쏟게 됐다.  그러던 중 터진 ‘부산 정치 파동’은 나의 운명을 흔들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52년 7월 퇴임을 앞두고 있었다. 의회에서는 반(反)이승만 기류가 커 의회 간접선거로는 재집권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에 이승만은 대통령 직선제를 추진하면서 야당이 제안한 내각책임제를 버무려 이른바 ‘발췌(拔萃)개헌’을 강행했다. 이승만은 자기 뜻대로 2대 대통령 재선에 성공했다.

나는 부산 정치 파동을 통해 권력욕에 눈이 멀어 헌법을 멋대로 고치는 정권의 추악한 모습을 생생히 목격했다. 그때 다짐했다. “나라가 바로 서려면 정치가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정계에 뛰어들기로 했다.

목포에서 첫 낙마…서울로 진출

전쟁이 끝나고 54년 5월 제3대 민의원 선거가 다가왔다. 중앙 정계 진출을 모색하던 내게는 기회였다. 단기필마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역부족이었다. 10명 후보 중 5등을 했다. 정당 기반 없이 선거를 치른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였음을 깨달았다.

본격적인 정당 정치 활동을 위해 부산 생활을 정리하고 ‘정치 중심’ 서울로 입성했다. 서울 남영동에 살았다. ‘한국노동문제연구소’에 주간으로 출근하면서 ‘동아일보’ ‘사상계’ 등 신문과 시사지에 글을 기고하며 시사평론가로 활동했다. 동시에 중앙 무대에 문을 두드렸다. 56년 5월 정·부통령 선거에서 집권 여당인 자유당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민주당의 장면이 부통령으로 선출됐다. 이승만은 3연임에 성공했다. 나는 장면을 지지하며 부통령 당선을 도왔다.

장면 대부로 모시고 가톨릭 신자로

이런 인연으로 장면 부통령을 대부(代父)로 모시고 가톨릭 신자가 됐다. 서울 중림동성당의 김철규 신부가 집전했다. ‘토머스 모어’라고 세례명을 주면서 신부님이 말했다.

“토머스 모어(1478~1535)는 영국에서 영향력이 큰 대법관이자 정치인인데 헨리 8세의 이혼을 인정하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고 끝까지 버텨서 작두로 목이 잘린 분입니다. 당신도 교회를 위해서 순교할 생각을 가지고 이 이름을 받으세요.”

순간 섬뜩했다. 왜 하필 목 잘린 사람을 세례명으로 주는지 의아했다. 권세와 부귀영화를 거부하며 자신의 믿음과 신념을 지킨 토머스 모어의 참모습을 알게 되면서 세례명에 감사했다.

목포 이어 인제에서도 내리 세 번 실패

61년 5·16 쿠데타 이후 계엄사무소 앞에서 장도영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왼쪽)과 박정희 부의장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61년 5·16 쿠데타 이후 계엄사무소 앞에서 장도영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왼쪽)과 박정희 부의장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장면이라는 든든한 후원자를 얻었지만,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58년 4대 민의원 선거를 앞두고 정치적 고향인 목포에서 다시 출마하려 했으나, 민주당 현역 의원에 밀려 공천을 받기 힘들었다.

대안으로 찾은 곳이 강원도 인제였다. 아무런 연고가 없었다. 솔직히 갈 데가 없어 그리 갔다. 한 가닥 희망은 보였다. 인제는 군인 유권자가 8할인 지역이었다. 군인과 그 가족은 야당 지지 성향이 강했다. 식량과 부식비를 빼돌리는 등 군대 내 부패에 분개했고, 자유당 정권의 독재에도 반감을 가졌다. 그들은 부당한 처우 개선과 부패 척결을 바라며 야당 편에 섰다. 공정한 선거만 하면 당선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출마조차 못 하고 주저앉았다. 자유당 정권의 공작으로 후보 등록이 무효가 됐다. 후보 등록 방해 사건을 법원에 제기했고, 이듬해 재판에서 이겼다. 재선거가 실시됐지만 역시 녹록지 않았다.

자유당에서 경찰서장 출신이 나왔다. 당시 경찰은 군 못지않게 입김이 셌다. ‘김대중은 공산당이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김대중을 왜 찍느냐’는 흑색선전이 돌았다. 군인과 이북 사람이 많던 인제는 공산당이라면 벌벌 떨었다. 군에서는 부정선거가 일어났다. 투표용지를 미리 까본 뒤 민주당 표는 버리고, 자유당 표만 투표함에 집어넣었다. 세 번째 도전도 실패했다.

미인계 공작에 넘어갈 뻔한 아찔한 순간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선거운동 중 정치 인생을 망칠 뻔한 아찔한 순간이 지금도 기억난다. 유세가 한창이던 어느 날 저녁, 지인과 밥을 먹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지구당 관계자가 불쑥 찾아왔다. ‘(김대중 지구당) 위원장님! 여기 미인이 왔습니다. 오늘 저녁에 같이 지내십시오’라며 한 여성을 밀어 넣고 사라졌다. 내가 깜짝 놀라서 ‘이게 무슨 짓이냐’며 여성을 방에서 내보냈다.

그런 뒤 30분쯤 지났을까, 누군가 방문을 확 열어젖혔다. 불쑥 나타난 정복 경찰이 방 안을 들여다보더니 ‘아이고, 순찰 나왔는데 실례했습니다’라고 말하곤 돌아갔다. 누군가 내가 여성과 같이 있는 불륜의 현장을 덮치려 함정을 팠던 것 같다. 그 계략에 빠졌다면 나는 파렴치한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영원히 매장됐을지도 모를 사건이었다. 등골이 써늘했다.

선거 탓에 집안은 ‘거덜’

개인적 삶도 고통스러운 시절이었다. 기둥뿌리가 뽑힌다는 선거를 몇 번씩 하는 바람에 집안이 거덜나다시피 했다. 서울에 올라와 집을 여덟 번이나 옮겨 다녔다. 끼니 때우기도 벅찰 정도로 곤궁했다. 세 번째 낙선한 직후인 59년 여름 지병을 앓던 아내 차용애마저 두 아들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홀아비의 처량한 신세가 됐다.

그래도 정치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60년 자유당 정권이 붕괴했다. 그해 3·15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 12년간 지속한 장기 집권 체제를 연장하려다 4·19혁명으로 무너졌다. 민주당 주도로 대통령 중심제에서 의원 내각제로 개헌했다. 의회에서 대통령 윤보선과 국무총리 장면을 선출해 제2공화국이 출범했다. 이어진 5대 민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은 압승했지만, 나는 인제에서 또 떨어졌다.

천신만고 끝에 쟁취한 의원직 또 잃어

절치부심하던 중 인제에서 보궐선거를 치르는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3·15 부정선거에 개입한 현역 의원의 의원직이 박탈당했다. 그 기회를 잡아 4전5기 만에 성공했다. 지난날들의 고난을 잊게 하는 기쁨은 한순간이었다. 박정희의 5·16쿠데타는 나를 ‘3일 국회의원’으로 끝내는 불운과 시련 속에 또다시 몰아넣었다. 그것은 박정희와 18년간 이어질 악연의 시작이었다.

☞민의원(民議院)=1952년의 발췌개헌안은 대통령 직선제와 참의원(參議院·상원)·민의원(하원) 양원제를 골자로 한다. 양원제는 헌법상의 규정에 불과해 이후 선거에서 참의원 없이 민의원만 선출했다. 민의원이 현재의 국회의원과 같은 역할을 했다. 60년 4·19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붕괴한 후 61년 5·16 군사정변까지 존속한 제2공화국에서 양원제가 잠시 운용됐지만, 제3공화국(1963~72년)에서 단원제로 변경됐다.

5회 〈박정희에 맞서 대통령 후보가 되다〉가 이어집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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