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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대기업으로 돌아갈래” 판교 뜨는 ‘연어’ 개발자들 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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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정보기술(IT) 스타트업으로 이직했다가 다시 대기업으로 회귀하는 ‘연어 MZ 직장인’이 늘고 있다. 사진은 경기도 판교 테크노밸리 단지. 전민규 기자

정보기술(IT) 스타트업으로 이직했다가 다시 대기업으로 회귀하는 ‘연어 MZ 직장인’이 늘고 있다. 사진은 경기도 판교 테크노밸리 단지. 전민규 기자

경기도 성남시 판교에 있는 한 금융 플랫폼 스타트업에 다니던 김모(32)씨는 지난 4월 첫 직장이던 대기업에 재입사했다.

알을 낳을 때 태어난 강을 찾아가는 연어처럼 ‘친정’으로 복귀했다. 그런데 차이점이 있다. 그는 ‘젊어서’, 그것도 연봉을 줄여가며 ‘어렵게’ 돌아왔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0년 말 헤드헌터의 제안으로 사이닝 보너스(1회성 인센티브)에 연봉 2000만원을 올려서 보란 듯 새 일터로 옮겼지만, 불과 2년여 만에 복귀했다. 김씨는 “첫 취업 때보다 어렵게 재입사했다”고 털어놨다.

S기업이 첫 직장인 이모(33)씨도 1년간 스타트업에 다니다 최근 L사로 이직을 결정했다. 이씨는 “근무지 이력을 따지면 수원→판교→마곡인 셈인데, 지금 회사(스타트업)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장밋빛 미래’가 너무 멀다는 현실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헤드헌팅 업체 “스타트업 엑소더스”

5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최근 정보기술(IT) 스타트업행(行)에 나섰다가 다시 대기업으로 돌아오는 이른바 ‘연어 MZ 직장인’이 늘고 있다. 코로나19 엔데믹 이후 IT 시장에 한파가 불어닥친 게 가장 큰 요인이다. 여기에 이질적인 기업문화도 영향을 준 것으로 풀이된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정보통신 업종에서 대·중소기업 간 이직률 격차는 2020년 1분기 1.2%포인트에서 올 1분기 1.8%포인트로 크게 뛰었다. 격차가 커질수록 중소→대기업 이직자 비중이 높다는 뜻이다. 익명을 요구한 헤드헌팅 업계 관계자는 “불과 2~3년 만에 스타트업 엑소더스(대탈출)가 벌어지고 있다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스타트업을 떠나는 젊은 직장인 대부분은 안정적인 보수와 복지, 정년을 보장하는 이른바 ‘수·양·마’(각각 수원·양재·마곡에 주로 입주한 삼성·현대차·LG를 가리킴)로 돌아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스타트업의 성공 대명사로 불렸던 네·카·라·쿠·배(네이버·카카오·라인·쿠팡·배달의민족)에서 대기업 출신 인재를 빨아들였다가 불과 2~3년 만에 토해 내는 셈이다.

실제로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급성장했던 IT 스타트업 중 구조조정을 진행 중이거나 고려하고 있는 기업이 늘고 있다.

프롭테크(부동산+기술) 기업인 직방은 최근 2~3개월 새 전체 임직원의 10%가량이 회사를 떠나 지금은 임직원 수가 400명대다. 2021년 초 ‘개발자 초봉 6000만원+이직 보너스 1억원’을 내걸고 인재 영입 경쟁에 불을 댕겼던 것과 대조되는 모습이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스마트팜 구축을 통해 농업계에서 대표적인 ‘유니콘’(기업 가치가 10억 달러 이상인 비상장 기업)으로 꼽히던 그린랩스도 대규모 구조조정을 했다. 국민연금 통계에 따르면 이 회사의 올해 1~4월 퇴사자 수가 300여 명에 달한다. 전체 임직원의 70%가량이다. 유명 핀테크(금융+기술)인 뱅크샐러드, 온라인 수업 플랫폼인 클래스101 등에서도 최근 전체 직원의 10%가량이 퇴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온·오프라인 수업 플랫폼 탈잉, 공유 오피스 패스트파이브,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왓챠, 다중채널네트워크(MCN) 기업 샌드박스네트워크 등도 인력을 감축했다.

인플레이션 여파, 벤처 돈줄 말라붙어

스타트업에 재직 중인 30대 김모씨는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개발자 몸값은 부르는 게 값’이란 말이 돌았는데, 최근엔 다니는 회사에서 잘리지만 않으면 다행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개발자 김모씨는 “아직 연봉 협상이 안 되고 있다. 직원 사이에선 ‘이러다 연봉이 깎이는 거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고 전했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투자자의 지갑도 닫히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비대면·디지털 경제가 활성화하며 IT 스타트업 등에 뭉칫돈이 흘러들었지만, 최근엔 디지털 경제를 견인할 동력이 대부분 사라진 데다 경기 침체와 인플레이션 여파도 짙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올해 1분기 벤처 투자액은 8815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2조2214억원)보다 60.3% 감소했다. 특히 정보통신기술(ICT) 서비스 74.2%(7688억→1986억원), 게임 73.7%(746억→196억원) 등에서 감소 폭이 큰 것으로 집계됐다.

여기에다 일부 스타트업에서 보이는 ‘독선적 기업문화’가 대기업 유턴의 또 다른 원인으로 꼽기도 한다. ‘연어 개발자’인 전모(35)씨는 “대표의 기분에 따라 회사 분위기가 천당과 지옥을 오가기도 했다”며 “‘나중에 좋아질 것’이라는 얘기는 희망 고문에 그쳤다. 더는 못 참겠다 싶어 몇 개월간 구직 활동을 했다”고 말했다.

전문가는 ‘스타트업 버블’이 꺼지고 있는 징조로 해석한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팬데믹 시기엔 실제 사업능력이나 성과와 관계없이 전반적으로 투자 붐이 있었다”며 “젊은 직장인에겐 스톡옵션 같은 추가적 이윤 기회와 성과 보상체계에 관심이 쏠렸지만, 단기간에 사정이 악화하면서 다시 살길을 찾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채호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당장 ‘생존 모드’에 돌입한 것”이라며 “기업 자체로 자생력을 갖추는 한편, 스타트업 생태계가 위축되면 경기 회복 국면에서도 결실을 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중장기적 안목에서 투자가 이어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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