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될 판" 가장 값싼 원전, 남아도 못 쓴다…文태양광의 역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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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영광에 위치한 한국수력원자력 한빛원자력본부 주제어실(MCR) 전경. 가운데 계기판의 숫자 '100'은 100% 출력을 의미한다. 사진 한수원

전남 영광에 위치한 한국수력원자력 한빛원자력본부 주제어실(MCR) 전경. 가운데 계기판의 숫자 '100'은 100% 출력을 의미한다. 사진 한수원

지난달 28일 전남 영광의 한빛원자력본부. 석가탄신일을 낀 연휴였지만 서해안 유일 원전 단지인 이곳의 원자로 5기는 쉬지 않았다. 올해 국내 언론 처음으로 들어간 6호기 주제어실(MCR)에선 6명의 직원이 바삐 움직였다. 이들은 점심시간에도 배달 온 식판을 책상에 올려놓고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주제어실 한가운데 계기판엔 '100'이라는 붉은 숫자가 선명했다. 이날 6호기가 100% 가동되고 있다는 의미다. 한빛 원전에선 지난해에만 3373만8000메가와트시(㎿h)의 전력이 생산됐다. 전남 지역 전체 전력 소비량과 맞먹는다.

하지만 앞서 한빛 6호기는 100%라는 숫자가 여러 차례 흔들렸다. 한국수력원자력에 따르면 올해 봄(3~5월) 한빛 원전에서만 5차례 출력 감소가 이뤄졌다. 6호기도 네 번이나 발전량을 80~85% 수준으로 일부러 줄였다.

이는 태양광 발전량 증가에 따른 전력 계통 안정화가 이유였다. 태양광 설비가 밀집된 호남 지역의 전력 과잉 생산에 따른 송전 과부하와 정전 사태를 막기 위해 가장 값싼 에너지원인 원전을 이용하려고 해도, 쓸 수 없는 상황이 빚어진 것이다. 이날은 출력 제어를 피했지만, 한빛 원전 관계자는 "맑은 날씨였다면 올봄 마지막 출력 감소가 이뤄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28일 방문한 전남 영광의 한 태양광 발전소. 영광=나상현 기자

지난달 28일 방문한 전남 영광의 한 태양광 발전소. 영광=나상현 기자

올해 들어 태양광 발전 딜레마가 본격화되면서 그 여파가 원전, 송·변전망으로 옮아가고 있다. 지난해 글로벌 에너지 위기의 여파로 전기요금이 꾸준히 오르는 상황에서 신재생에너지보다 비용이 훨씬 싼 원전 가동을 줄이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 뒤엔 문재인 정부 당시 태양광 설비가 매우 빠르게 늘어난 반면, 전력 수요지까지 연결해줄 '고속도로' 격인 송전망 등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엇박자가 있다.

지난 정부에서 신재생에너지 확대를 내세우면서 태양광 발전 시설은 빠르게 늘어났다. 산업통상자원부가 한무경 국민의힘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18년 7.5기가와트(GW)였던 태양광 설비 용량은 지난달 들어 26.6GW로 3배 이상이 됐다. 이들 설비는 수도권(6.8%·지난해 말 기준)보다 설치 비용이 적게 드는 호남(42.1%), 영남(22.6%) 등에 집중됐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반면 이렇게 생산된 전력을 실어나를 송전선로 확충은 더뎠다. 한국전력에 따르면 2016년 총 송전선로 길이는 3만3696 C-km(길이에 회선 수를 곱한 값)에서 2021년 3만5190 C-km으로 늘어나는 데 그쳤다. 이창양 산업부 장관도 지난달 24일 국회에서 "지난 정부에서 송전망 투자가 상당히 지체됐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산업부는 올해 들어 태양광 설비가 밀집한 호남·경남 등을 중심으로 상황실 운영, 태양광·원전 출력 제어 같은 '봄철 전력수급 특별대책'을 시행했다. 냉방 수요가 많은 여름철에 수급 대책을 세우는 정부가 전력 비수기인 봄에 움직인 건 처음이다. 일조량이 많은 봄철에 태양광 발전량이 많아졌지만, 줄어든 전력수요 만큼 공급을 줄이기 어려운 구조가 작용했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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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지난 4월 30일과 5월 1일 이틀 연속으로 273메가와트(㎿)의 태양광 출력 제어가 이뤄졌다. 원전도 3월 19·26일, 4월 2·9·30일에 출력 감소가 진행됐다. 한빛 3호기가 5회로 최다였고, 한빛 2·6호기(4회)가 뒤를 이었다. 신고리·신월성·새울 등 다른 지역 원전에서도 1~3회 이뤄졌다.

호남 등에서 남는 전력을 수요가 많은 수도권으로 보내는 게 송·변전 여건상 쉽지 않으니, 발전량 자체를 축소한 것이다. 더이상 석탄·LNG(액화천연가스) 발전 등을 조절하는 것만으로 전력 안정성을 보장할 수 없다는 걸 보여준다. 봄과 가을도 전력 문제의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의미다. 전영환 홍익대 전자전기공학부 교수는 "앞으로 전력 수요가 적은 봄·가을마다 발전 과잉 문제가 심화하면서 출력 제어 상황도 더 많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기저 전원인 원전 가동을 줄이면 손실은 고스란히 국민 몫으로 돌아온다. 올해 1분기 한전은 원전 발(發) 전력을 킬로와트시(㎾h)당 46.2원에 사 왔는데, 신재생 전력의 구매 단가는 197.7원이었다. 한전 적자가 확대되고 전기료 인상 압박도 커질 수밖에 없다.

태양광 사업에 뛰어든 이들도 볼멘소리를 내고 있다. 영세 태양광 사업자들에게 별도 보상 없는 출력 제어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다는 주장이다. 지난달 28일 영광의 1㎿급 발전소 앞에서 만난 홍유길 풍산파워텍 대표는 태양광 보급 과속으로 손해가 크다고 강조했다. 2020년 대규모 투자에 나섰다는 그는 "전 정부에서 태양광을 활성화할 때 송배전망을 같이 확대해야 했는데, 미루고 미루다 늦어버렸다"면서 "출력 제어가 계속 이뤄지면 손해가 커질 게 뻔하다. 정부만 믿고 뛰어든 우리만 바보가 될 상황"이라고 했다.

태양광 사업자들은 출력 제어에 대한 명확한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보상 근거를 담은 법 개정안은 국회에서 계류 중이다. 홍기웅 전국태양광발전협회 회장은 “정부가 먼저 재생에너지 보급을 장려했으면서, 이제 와서 출력제어에 따른 피해는 사업자가 떠안아야 한다는 건 무책임한 행동”이라며 “보상도 없이 출력 제어를 강행하면 영세 사업자들은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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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제를 해소하려면 송·변전망 확충이 시급하지만, 천문학적 손실이 쌓인 한전으로선 감당이 쉽지 않다. 그마저도 시설 투자비가 갈수록 느는 데다 주민 반대 등이 거세 진행 속도는 거북이걸음이다. 기약 없는 비용 청구서만 쌓이는 셈이다.

한전에 따르면 8차 장기송변전 계획에선 2017~2031년 송·변전 투자비로 26조4479억원이 소요될 것으로 전망됐다. 하지만 올해 확정된 10차 계획에선 2022~2036년 56조5150억원이 들어갈 것으로 산출됐다. 똑같은 15년 치 계획이지만, 5년 새 비용 부담이 두 배 이상으로 불어난 것이다. 여기엔 데이터센터 등 수도권을 중심으로 전력 수요가 갈수록 늘어나는 반면, 태양광 발전 시설은 주로 호남 등에서 늘어나는 데 따른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가 영향을 미쳤다.

박종배 건국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문재인 정부는 전력 생산만 늘렸지 허리 역할을 할 도로는 없었다. 그 문제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고 앞으로 반복될 가능성이 큰 만큼 지금이라도 송·변전망 확충 논의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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