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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 우승' 김태한 심사한 조수미…"못하면 억울" 죽기전 꼭 할 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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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소프라노 조수미. 사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2023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소프라노 조수미. 사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음반으로만 듣던 바리톤 호세 반 담과 심사위원석에 나란히 앉으니 영광이었죠. 10년 전 샤틀레 극장 ‘닉슨 인 차이나’에서 공연했던 소프라노 준 앤더슨도 반가웠어요.”
성악 부문인 올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는 소프라노 조수미가 심사위원을 맡아 화제가 됐다. 심사위원장 베르나르트 포크롤을 비롯해 메조소프라노 베르나르다 핑크, 소프라노 파트리샤 프티봉 등 심사위원진 17명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콩쿠르 결선 마지막날인 3일 오후(현지시간) 브뤼셀 시내에서 만난 조수미는 “우리나라 가수들 노래하는 것만 봐도 눈물이 나더라”고 했다.

“저는 유럽사람들에게 한국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아티스트라고 설명해요. 이탈리아 사람들과 비슷한 기질이 DNA에 있어요. 감정적이고 흥이 있죠.”
이번 대회에도 12명의 결선 진출자 중 우승자인 바리톤 김태한, 5위인 베이스 정인호, 바리톤 권경민 등 한국인이 3명으로 최다였다. 심사 기준에 대해 그는 "타고 난 재능이 있느냐가 가장 중요하고, 그 다음이 언어의 습득과 구사"라고 답했다.
벨기에의 마틸드 왕비는 콩쿠르의 상징적인 존재다. 결선이 열리는 팔레 데 보자르 콘서트홀에서도 심사위원단이 입장한 뒤 왕비가 귀빈석에서 손을 흔들면 청중 전원이 기립한다.
“결선 첫날 왕비님 점심만찬에 초대됐어요. 한국을 참 친근하게 생각하시더군요. 한국예술종합학교 방문 때 인상 깊었다 하시고, 김치를 좋아하셔서 손으로 찢어서 드실 정도래요. ‘음악은 세대, 문화와 상관없이 모두를 하나로 묶어 준다’고 하셨어요.”

조수미는 다음 라운드에 올라가지 못한 참가자들을 위한 ‘피드백 세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조언하는 데도 열심이었다. 심사위원들의 솔직한 조언이 자신에게도 큰 도움이 됐다는 조수미는 탈락자들에게 "포기하지 마라. 너 자신을 믿으려면 연습 밖엔 없다"고 동기 부여를 한 뒤 개인적인 조언을 한다고 했다.

2023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소프라노 조수미(오른쪽). 사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2023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소프라노 조수미(오른쪽). 사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조수미는 얼마 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한·오 수교 130주년 기념 무대에서 노래한 뒤 개런티를 학생 다섯 명에게 장학금으로 내놨다. "여러 콩쿠르 심사를 하며 우리나라의 문화적 위상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는 조수미는 "우리 아티스트들을 도와줘야겠다는 소망이 생겼다"고 했다.
1989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가면무도회’에 발탁된 이후 조수미는 세계적인 소프라노의 길을 쉼 없이 걸어왔다. "K클래식이 각광받는 현실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다. 한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모르는 유럽에서 선배들이 헤쳐나간 시간들이 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조수미는 말한다.
조수미가 활동하던 1980년대의 K클래식은 척박했다. 일본 가수인 줄 알고 찾아온 일본 사람들을 조수미는 기억한다. 동양인처럼 안 보이는 게 중요하던 시절이었다.
“어린 마음에 서양인들과 비슷하게 되려고 애썼던 때도 있었지만 곧 정체성을 찾았죠. 한국인이란 걸 잊고 산 적 없습니다. 누가 한국을 흉 보면 내 어머니 흉 보는 것처럼 느꼈어요. 빨리 나라가 잘 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조수미는 88 서울올림픽 이후 확 올라간 한국의 위상을 피부로 느꼈다고 했다. 어디에 가든 한국 가곡을 불러 달라 하고, 음반에도 ‘보리밭’을 한국어로 새겨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이제 한국에서 온 것 자체가 하나의 보장이 됐어요. 행복하고 놀랍죠. 한 편으론 이런 기조를 얼마나 오래 유지할 수 있을지 고민해봐야 해요. 세계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소재가 필요합니다.”
다음달, 조수미는 베를린 필 12첼리스트와 내한 투어를 갖는다. 4일 부산문화회관, 5일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6일 서울 롯데콘서트홀, 8일 부천아트센터, 9일 강릉아트센터에서 공연한다.
“악기 중에 첼로를 좋아해요. 12명 중 두 분이 여성이더군요. 영화음악, 뮤지컬 온갖 곡들을 편곡해서 하는데 느낌이 좋아요. 음악으로 여러 사람들과 협업하는 기쁨은 연애 감정이나 초콜릿 단맛 저리 가라예요.”

이후에는 한미 동맹 70주년을 기념한 미국 투어가 있다. 뉴욕·시애틀·샌프란시스코에서 공연한다. 내년 7월에는 파리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조수미 국제 성악 콩쿠르’를 연다. "오랜 꿈의 실현"으로 "유럽의 세련된 감성과 전통을 겸비한 대회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성악가로 롱런해온 비결을 묻자, 인간관계가 가장 중요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내가 가진 열정의 불을 끄는 사람은 과감히 멀리 해야 해요. 그 불을 꺼지지 않게 하는 사람들과 함께해야 도움이 됩니다. 저도 도움을 주는 사람이고 싶어요.”

장애인을 돕는 일과 동물, 자연에 대한 일들은 계속 가져갈 그의 관심사다. 끝으로 꼭 하고 싶은 게 있다고 했다. “죽기 전에 진한 사랑 꼭 한 번 해보고 싶어요. 멋진 사랑 못 하면 억울할 것 같아요.”

브뤼셀=류태형 객원기자·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ryu.taeh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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