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REPORT

전쟁기념관을 찾은 이종혁 광운대 교수가 참전 용사들 비석을 둘러보고 있다. 최영재 기자
국가보훈처가 5일 창설 62년 만에 국가보훈부로 승격되는 것을 계기로 추진하는 ‘끝까지 찾아야 할 태극기 121879’ 배지 달기 캠페인은 당초 정부가 마련한 프로젝트가 아니었다. 오히려 민간 차원에서 3년 전 먼저 아이디어를 내고 자발적으로 활동에 나서자 정부도 이에 적극 호응하면서 범국민적 캠페인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캠페인은 2020년 5월 이종혁 광운대 공공소통연구소장(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의 고민에서 시작됐다. 당시 이 교수는 6·25전쟁 70주년을 앞두고 ‘우리 사회엔 왜 전 국민이 공감하는 보훈의 상징이 없을까’ ‘어떤 보훈의 상징이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물론 당시에도 보훈처가 제작한 ‘나라 사랑 큰 나무’라는 상징이 있었지만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지 않다 보니 보훈의 달인 6월이 돼도 일부 정치인과 관료들만 배지를 다는 데 그쳤다.
서울 노원구 광운대 캠퍼스에서 중앙SUNDAY와 만난 이 교수는 3년 전 태극기 배지를 구상할 당시를 회상하며 보훈 상징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보훈은 현재를 통해 과거를 미래로 이어가는 국가적 가치다. 영미권국가에서는 일반 시민들도 현충일이 있는 달이면 너도나도 보훈의 상징인 양귀비꽃(Poppy·포피) 장식을 자발적으로 달고 다닌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분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문화가 정착돼 있는 것이다. 반면 우리는 6월을 호국보훈의 달로 삼고 있으면서도 정작 일상에서는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해준 과거의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데 인색했던 게 현실이다.”
그는 그러면서 “이유가 뭘까 고민하다가 이런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국민이 기꺼이 공감할 수 있는 보훈의 상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전장에 피어 있는 양귀비꽃을 보고 쓴 추모시가 알려지며 서구 각국에서 양귀비꽃이 보훈의 상징이 된 것처럼 한국의 보훈 상징에도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스토리가 담겨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는 설명이다. 그때 문득 떠오른 게 전사자 유골함을 태극기로 감싼 모습이었다.
- 태극기를 상징으로 삼기까지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 “무엇보다 보훈의 상징은 디자인하는 게 아니라 ‘찾아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야 보다 많은 국민이 자연스레 공감할 수 있지 않겠나(이 교수는 인터뷰에서도 태극기 상징을 ‘만들었다’가 아닌 ‘발견했다’고 표현했다). 이런 시각을 바탕으로 보훈의 의미와 스토리를 가장 잘 담고 있는 게 뭘까 살펴보던 중 유해 발굴 현장에서 상징을 찾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전사자 유골함을 감싼 태극기를 접한 순간 이거야말로 인위적으로 디자인한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자 한국 보훈의 상징으로 부족함이 없겠다 싶었다.”
- 보훈의 상징을 거듭 강조하는 이유는.
- “보훈은 여야·이념·세대·젠더 등 우리 사회의 온갖 갈등 요소를 초월해 국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다. 그리고 이 가치를 공유할 수 있게 해주는 매개체가 바로 보훈의 상징이다. 누군가 디자인하고 만들어낸 상징은 호불호가 있을 수 있지만 우리네 역사 속에서 ‘찾아낸’ 상징은 그 자체로 충분한 의미를 담아낼 수 있다. 태극 문양을 보고 어떤 사람은 독립운동가를, 어떤 사람은 민주열사를 떠올릴 수도 있을 거다. 바로 그런 게 상징의 효과다.”
이후 이 교수는 전사자 유골함을 감싼 태극기 모양의 배지 제작에 착수했다. 학생들도 제작 의도를 설명하자 흔쾌히 동참하고 나섰다. “할아버지나 달고 다니는 것”이라며 꺼릴까 싶었지만 기우였다. 곧바로 태극기 배지 500개를 만들어 배포하는 작은 캠페인을 벌였다. 반응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일주일도 안 돼 배지가 모두 소진됐다. 국가보훈처도 소식을 접하고 적극 지원에 나섰다. 그러면서 ‘끝까지 찾아야 할 태극기 122609’ 캠페인이 본격화됐다. 당시까지 유해가 수습되지 못한 국군 용사 12만2609명의 희생정신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담은 문구였다.
- 당시 캠페인에 대한 반응은 어땠나.
- “노인부터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대에서 뜨거운 호응이 있었다. 12만2609개의 배지를 제작해 배포했는데 신청이 폭주해 온라인 서버가 다운될 정도였다. 배지를 착용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SNS에 사진을 올리는 등 캠페인 공유에 적극 나서기도 했다. NH농협은 물론 전국 1만4000여 개의 GS25 편의점도 플랫폼 역할을 자처하면서 사실상 처음으로 민간이 앞장서는 보훈 캠페인이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 ‘끝까지 찾아야 할 태극기’ 뒤에 붙은 숫자는 더 이상 122609가 아니다. 지난 3년간 730명의 유해가 발굴되면서 ‘121879’로 바뀌었다.
- 첫 캠페인 이후 숫자가 줄어들었다.
- “감회가 새롭다. 국가가 유해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수치라는 점에서다. 숫자가 줄면 시민들도 내년엔 또 얼마나 줄어들지 자연스레 관심을 갖게 되지 않겠나. 주목할 부분은 여기엔 미래 지향적인 메시지 또한 담겨 있다는 점이다. 미래 세대들이 숫자가 ‘0’이 될 때까지 캠페인을 꾸준히 이어나간다면 그 자체로도 큰 의미가 있지 않겠나. 또한 6·25전쟁 70주년에 시작된 캠페인을 정전 70주년에 그대로 이어받았다는 점에서도 적잖은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본다. 이는 보훈이란 가치가 이념이나 정치 성향 등을 뛰어넘어 범국가적·범국민적 관심사로 자리매김하게 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효과가 기대된다.”
이 교수는 올해도 20여 명의 학생과 함께 태극기 배지 달기 캠페인 확산에 적극 나설 계획이다. 3년 전 캠페인에 참여했던 졸업생 5명과 이번에 처음 동참하는 재학생 16명도 머리를 맞대고 크라우드 펀딩 등 캠페인 활성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보훈의 상징을 활용한 티셔츠와 팔찌 등 관련 상품 제작도 준비 중이다. 수익금은 전액 기부할 예정이다.
이 교수는 “서양의 양귀비꽃 문화처럼 우리의 현충일에도 자발적이고 다양한 방식으로 보훈 상징이 공유될 필요가 있다”며 “무엇보다 관이 주도했던 기존의 방식과 달리 민간이 중심이 되는 캠페인이 활성화될 때 새로운 보훈 문화도 보다 쉽게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철학자 에르네스트 르낭은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공동체의 본질”이라고 강조했다. ‘끝까지 찾아야 할 태극기’ 캠페인과 함께 매년 줄어드는 숫자를 지켜보며 과거를 기억할 수 있느냐는 이제 국민의 자발적인 참여와 정부의 적극적인 의지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