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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국민이 함께할 가치 될 수 있게 보훈 패러다임 바꿔야 [업그레이드 한국 보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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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2호 08면

SPECIAL REPORT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지난 1일 대전광역시 국립대전현충원을 찾은 어린이들이 순국 장병들의 묘비를 정성스레 닦고 있다. 김성태 객원기자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지난 1일 대전광역시 국립대전현충원을 찾은 어린이들이 순국 장병들의 묘비를 정성스레 닦고 있다. 김성태 객원기자

2023년 6월은 대한민국 보훈 역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국가보훈처가 창설 62주년을 맞아 ‘국가보훈부’로 재출범하는 역사적 분기점을 맞게 됐다는 점에서다. 한국의 보훈은 그동안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보훈 업무를 주관하는 정부 부처도 1961년 군사원호청으로 출범한 이래 차관급과 장관급 부처로 수차례 바뀌는 등 부침을 거듭했다. 〈그래픽 참조〉

그런 가운데서도 국민의 꾸준한 관심 속에 보훈의 위상이 하나둘 정립돼 나갔다. 당장 보훈의 개념부터 ‘돕고 보살펴 준다’는 시혜적 의미인 ‘원호(援護)’에서 국가를 위해 희생·헌신한 국민을 최대한 예우하고 그 공훈에 보답한다는 취지인 ‘보훈(報勳)’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 보훈의 대상도 참전 용사들을 주요 대상으로 삼는 외국과 달리 ‘독립·호국·민주’ 등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을 아우르며 지속적으로 확대됐다. 또한 보훈이란 공통분모를 통해 국제 협력을 증진하는 등 보훈 외교의 비중도 한층 커지고 있다. 이 같은 한국 보훈의 발전 과정은 대한민국의 높아진 위상과도 그 맥락을 같이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작지 않다.

국가 품격 높일 보훈 실현 기회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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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도 보훈은 국가 공동체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 왔다. 고대 그리스 패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 페리클레스의 연설이 대표적이다. 아테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페리클레스는 연설에서 아테네 민주주의 체제를 외부의 적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목숨을 바친 용사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전하며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하는 게 공동체의 기본 의무라고 역설했다.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연설로 널리 알려진 에이브러햄 링컨 전 미국 대통령의 게티스버그 연설도 사실은 전몰 용사들의 넋을 위로하는 추모사였다. 링컨은 민주주의 공동체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전쟁 희생자들의 헌신에 깊은 감사를 표하며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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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도 신라 때부터 보훈의 역사를 꾸준히 이어왔다. 신라 진평왕 때인 625년 만들어진 상사서를 비롯해 고려 시대 고공사, 조선 시대 충훈부 등이 그것이다. 이들 관청이 시행한 보훈 제도는 지금처럼 체계화돼 있진 않았지만 국가에 대한 헌신과 희생을 기리고 그에 합당한 보상을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선 다를 게 없었다. 이처럼 보훈은 동서고금의 역사 속에서 시공을 초월해 공동체의 존속과 번영을 담보하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자리매김해 왔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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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세계 각국도 각 나라의 역사적 맥락과 정치·사회·문화적 토대 위에서 보훈 정책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그럼에도 국가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분들에 대한 예우와 보상을 통해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고 구성원들의 일체감과 결속을 강화하며 이를 바탕으로 국가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선 다를 게 없다.

다만 다른 나라들의 보훈이 외부의 적으로부터 국가 공동체를 지키고 보존하는 ‘호국’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데 비해 우리의 보훈 정책은 호국에 더해 일제로부터의 ‘독립’과 대한민국 제1의 가치 중 하나인 ‘민주’를 세 개의 주요 축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즉 대한민국의 보훈 정신은 독립운동과 건국 정신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여기에 해방과 국가 수립 후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몸 바쳐 수호하고자 했던 멸사봉공의 정신과 4·19와 5·18 등 민주주의 공동체 유지를 위해 헌신한 분들의 희생정신이 더해지면서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됐다.

이런 맥락에서 윤석열 정부는 ‘일류 보훈 실현을 통해 대한민국의 품격을 높이겠다’는 기치 아래 미래지향적 보훈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국가보훈부를 새롭게 출범시키게 됐다. 이제 국가보훈부 장관은 국무위원으로서 국무회의 심의·의결권을 갖는 등 대폭 강화된 권한을 바탕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보훈 정책을 추진해 나갈 수 있게 됐다. 세계 최고 수준의 보훈 제도를 운영하는 미국의 사례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이미 1989년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때 보훈 총괄 부처를 제대군인부로 격상시켰고 조직 규모도 행정부 주요 부처 중 국방부 다음으로 크게 키웠다. 지난해 보훈 예산만 약 344조원으로 미 정부 전체 예산의 4.6%에 달할 정도다.

그런 만큼 우리도 국제사회에서 명실상부한 선진국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경제성장 못지않게 새로운 보훈 정책 패러다임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한국 보훈의 세 축인 독립·호국·민주 정신의 이론적 토대를 체계적으로 정립·발전시키는 것과 더불어 이에 대한 국민적 이해를 높이고 각계각층의 공감대를 넓히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보훈을 민주시민 교육의 주요 테마로 삼고 교육 과정에 스토리텔링 방식을 적극 도입하는 등 대중이 보다 쉽게 접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방안도 강구할 필요가 있다.

사실 지금까지의 보훈 정책은 보훈 대상자 지원에 집중된 측면이 없지 않았다. 물론 국가 유공자 예우를 더욱 강화해야 하는 건 국가와 사회의 당연한 책무다. 하지만 이젠 이에 더해 국민의 자발적 애국심을 이끌어내고 보훈 문화가 사회 저변에 스며들게 하는 데 또 다른 정책적 주안점을 둘 때가 됐다. 보훈이란 두 글자가 지역·세대·계층 간 갈등과 이념·진영 논리 등 우리 사회의 온갖 장벽을 뛰어넘어 국민 모두가 공감하는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되면 국민 통합과 지속 가능한 국가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한 국가적 차원의 어젠다 설정이 절실히 요구되는 이유다.

K컬처 활용한 보훈 외교 모색을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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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 정책의 또 다른 외연 확장이라고 할 수 있는 ‘보훈 외교’의 질적 향상도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새로운 과제로 꼽힌다. 미국 등 주요 선진국들은 한결같이 보훈을 최상위 가치로 삼고 있는 만큼 이들 국가와 공동의 국제 규범을 구축하고 상호 협력을 확대하는 데 보훈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한국전쟁 때 유엔 참전국과 참전 용사들에 대한 예우를 통해 공감대를 넓히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경제적 협력의 틀을 강화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특히 최근 세계 각국의 큰 호응을 얻고 있는 K컬처를 적극 활용하는 것도 보훈 외교력 강화에 큰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 등 K팝은 물론 오징어 게임 등 K드라마, 기생충 등 K영화에 대한 지구촌의 관심은 자연스레 한국에 대한 관심의 증가로 이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 만큼 이 같은 추세를 십분 활용해 ‘소프트 파워’를 앞세운 21세기형 국제 보훈 전략을 추진할 경우 국제사회의 긍정적 반응 속에 적잖은 외교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주요 국가들과 문화·학술 행사 및 인적 교류를 지속적으로 확대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게 중요하다. 더불어 보훈 외교 현장에서 이 같은 프로그램을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새로운 관료 시스템도 시급히 구축돼야 할 것이다.

이처럼 국제사회에서 보훈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선진국들 사이에서는 보훈이 국가 발전의 척도로 인식되고 있을 정도다. 실제로 한국전쟁 휴전 후 65년이 지난 2018년 미국은 북·미 정상회담에서 한국전쟁 당시 미군 실종자 유해 발굴과 송환에 합의했고 그 결과 실종됐던 유해를 미국으로 무사히 인도할 수 있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순국선열들을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미국 정부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보훈 정책은 국가를 위해 공헌하고 희생한 분들에 대한 최대한의 보상과 예우를 통해 공동체 의식을 배양하고 국가와 사회의 정체성을 유지·강화하는 데 주된 목적이 있다. 그런 만큼 임기가 정해진 정부의 변화에 따라 정책이 수시로 바뀌지 않도록 정치권과 민간·시민단체들이 뜻을 모을 필요가 있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의 애국정신을 받드는 건 이념이나 세대·지역·계층을 초월해 모든 국민이 함께해야 할 공통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보훈 정책이 이 같은 공감대 속에 지속성을 유지해 나갈 경우 우리 사회의 통합에도 긍정적 기제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민적 소통과 참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정부도 일반 시민들이 적극 동참하는 보훈 문화를 이뤄나가기 위해서는 기존의 고정관념에서 탈피해 발상의 대전환을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다. 최근 보훈의료혁신위원회를 통해 수요자 중심의 보훈 의료 정책을 추진하고 나선 것도 좋은 선례가 될 수 있다. 21세기 보훈은 국민과 함께하는 보훈이어야 그 생명력을 담보할 수 있다. 국가보훈부 승격을 맞아 공급자적 관성을 벗고 과감한 ‘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을 통해 국민의 피부에 와 닿는 정책을 선보여야 할 때다.

유호근 청주대 교수·전 한국보훈학회장. 한국보훈학회장과 한국평화연구학회장, 한국국제정치학회 부회장 등을 지냈으며 현재 국가보훈처 정책자문위원과 한국동북아학회 이사 등을 맡고 있다. 『독립 호국 민주화에 나타난 보훈정신과 역사적 승계』 『MZ세대가 궁금해하는 한반도 평화통일 이야기』 등 보훈 분야에서 다수의 저서와 논문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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