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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미술 동시에 배운 김차섭, 판화작가로 이름 날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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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2호 26면

황인의 예술가의 한끼

왼쪽부터 김구림, 윤범모, 한 사람 건너 백남준, 김차섭, 전수천. 뉴욕. [사진 김명희]

왼쪽부터 김구림, 윤범모, 한 사람 건너 백남준, 김차섭, 전수천. 뉴욕. [사진 김명희]

김차섭(1940~2022)은 일본 야마구치 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곧 아이치 현의 나고야로 이주했다. 부친은 나고야 지방 방공 비행장의 공사감독을 맡은 건축기술자였다. 미군의 공습이 심해지자 그의 가족은 1944년 말, 고향인 포항 기계면으로 돌아왔다. 부친은 기계면에서 정미소와 제재소 사업을 시작했다. 이듬해에 해방이 되었다.

1947년 김차섭은 기계국민학교에 입학했다. 1949년 김차섭 가족은 기계에서 20리쯤 떨어진 경주 안강읍으로 이사했다. 김차섭은 안강읍의 강서국민학교를 다녔다. 4학년 때 한국전쟁이 났다. 형산강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안강전투가 벌어졌다. 김차섭 가족이 석 달 동안 포화를 피해 다니다 안강으로 돌아오니 9월 중순이 되었다. 김차섭은 논에서 벼를 세워 묶어주는 일을 하다가 버려진 기왓장을 발견했다. 무늬가 있는 오래된 기왓장이었다. 나중에는 그물추 도자기도 주웠다. 고대인이 쓰던 물건에서 역사를 더듬게 되었다. 그 뒤로 김차섭은 수집광이 되었다. 역사에 대한 끈질긴 관심은 작가가 된 후 작품의 주제로 연결되었다.

1956년 안강중학교를 졸업하고 경주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시인 유치환이 교장이었다. 2학년 때 미술감상수업시간이란 게 생겼다. 담당은 태평양미술학교를 나와 경주의 계림대학에서 미술 실기를 가르치고 있는 화가 김준식(1919~1992)이었다. 나중에 한국 실험미술의 선구자가 되는 김구림(1936~)은 김종배라는 이름으로 계림대학을 잠시 다닐 무렵이었다. 이 둘은 당시에는 서로 몰랐다.

국내 첫 메일 아트,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The Green (자화상), 1980~1983, 캔버스에 유화물감, 411x160㎝.

The Green (자화상), 1980~1983, 캔버스에 유화물감, 411x160㎝.

김차섭은 김준식의 지도를 받았다. 서울대 미대 입학을 목표로 석고 데생을 시작했다. 안압지가 보이는 교장실에 줄리앙 석고상을 놓고 맹연습을 했다. 교장 유치환이 격려해주었다. 서울대에 입학하니 동기로 곽훈(1941~), 최욱경(1940~1985), 이종상(1938~), 김지하(미학과, 1941~2022) 등이 있었다.

이 무렵 김차섭 집안은 가세가 많이 기울었다. 학비도 하숙비도 지원할 형편이 못되었다. 김차섭은 친구들과 적선동의 여관에서 친구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는데 부담이 컸다. 대구 경북고 출신의 곽훈이 잘 아는 사람이 명동에 사무실을 갖고 있는데 퇴근 후에 그 사무실을 써도 된다고 했다. 사무실 책상 위에 침낭을 펴니 그럴듯한 잠자리가 되었다. 김차섭, 곽훈 등 지방 출신 친구들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저녁에 모였다가 아침이면 자리를 비워주는 방식으로 이들의 잠자리는 해결되었다. 아르바이트로 궁색을 면하자 김차섭은 창신동에 판잣집 방을 하나 구하여 나갔다.

4·19 혁명이 난 해의 겨울이었다. 김차섭은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어 학비에 보태기로 했다. 부산에서 상경한 동래고 출신의 강국진(1939~1992)을 소개받았다. 그는 이미 실크스크린의 상당한 기술자였다. 실크스크린으로 만든 크리스마스 카드는 인기를 끌었다. 많이 팔려 나갔으나 자금 회수에 실패하여 실질적인 도움은 못 되었다. 이번에는 한쪽 길이가 50㎝ 정도 되는 양철판 위에 실크스크린을 하여 이 판을 버스와 전차 안에 붙이는 광고 사업을 하였다. 이게 큰 수입이 되었다. 돈을 벌려고 시작한 실크스크린 판화작업이었지만 결국 김차섭과 강국진은 나중에 판화작가로도 미술계에 큰 이름을 남기게 된다.

김차섭과 곽훈은 ROTC 1기다. 군에서 제대한 이 둘은 1965년 명륜동에 2층짜리 적산가옥에 미술학원을 열었다. 곽훈이 먼저 1966년에 이화여고 미술 교사로 부임했다. 혼자서 미술학원을 맡게 된 김차섭은 학원을 청진동으로 옮겼다. 실력이 있다는 소문이 퍼져서 학원의 경영이 잘 되었고 생활이 안정되었다. 1967년, 제4회 파리비엔날레의 출품작가가 되었다. 김차섭은 1968년 이화여중 미술 교사로 부임했다. 이듬해 이화여고 미술 교사로 적을 옮긴다. 이때 곽훈의 주도로 곽훈, 김구림, 김차섭, 박희자, 이자경, 차명희, 하동철, 한기수 등이 참여한 ‘회화68’ 동인이 결성되었다. 다 서울대 동문으로 익숙한 이름인데 곽훈이 추천한 김구림만 낯설었다. 서울대와 전혀 무관한 김구림은 당시 부산에서 대구, 서울을 오가며 활동을 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김차섭은 경주고등학교에서, 김구림은 김종배라는 본명으로 계림대학에서 비슷한 시기에 김준식의 지도를 받은 적이 있었다. 김차섭과 김구림은 친해졌다. 이 둘은 곽훈, 서승원, 최명영, 이승조, 김한, 박석원, 박종배, 하종현 등과 합세하여 AG 그룹을 결성했다. 평론가 이일, 오광수가 가세했다.

1969년 10월 10일 오전 10시 발신자 김구림과 김차섭 명의로 100통의 편지가 화가, 신문사 등에 보내졌다. 다음날, 또 다음날 합계 세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이 편지 세 통이 우리나라 최초의 메일 아트인 ‘매스미디어의 유물’이다. 이 작품은 올해 5월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9월부터는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전시된다.

그해 김차섭의 독립문 작업실로 서울미대 2학년생 김명희(1949~ )가 찾아왔다. 서울미대 영화 동아리 씨네 클럽의 촬영에 필요한 장소 섭외를 하러 온 것이었다. 김명희의 부친 김유택은 한국은행 총재, 주일 한국대표부, 주영 한국 대사관 대사, 제3 공화국의 초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원장을 지냈다. 김명희는 초등학교 시절을 일본과 영국에서 보내었다. 이화여중과 이화여고를 거쳐 서울미대에 입학했다.

김명희의 어머니는 김환기의 부인인 김향안과 경기여고 동기였다. 1959년, 4년간의 파리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김향안은 경기여고에 다니던 김명희의 큰 언니 불어 가정교사를 했다. 김명희의 부친이 김환기의 그림을 샀다. 김환기 부부에게는 생활의 도움이 되었다. 나중에 김명희가 뉴욕으로 유학을 갔을 때 김향안은 서울의 화랑들을 소개하는 등 김명희를 많이 챙겨주었다.

뉴욕 소호·춘천 폐교 오가며 기막힌 삶

김차섭과 그의 아내 김명희, 춘천 북산면 내평리.

김차섭과 그의 아내 김명희, 춘천 북산면 내평리.

김차섭이 근무하던 이화여고에 김명희가 시간제 교사로 왔다. 1973년 가을, 김차섭은 이화여고 안에 건축 중이던 유관순기념관의 벽화작업을 맡았다. 김명희도 참여했다. 이듬해 봄에 벽화가 완성되었다. 작업을 하며 이 둘은 가까워졌다. 남의 험담을 안 하는 김차섭이 왠지 김명희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표현을 학교 동료인 곽훈에게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종의 연막술이었다. 1974년 8월 김차섭은 록펠러 펠로십의 지원을 받아 뉴욕으로 갔다. 프랫대학 대학원에 입학했다. 1975년 10월 김명희가 뉴욕으로 왔다. 김명희는 이듬해 봄에 프랫대학 대학원에 등록했다. 그리고 둘은 결혼을 했다.

김차섭은 미술을 일종의 인문학 혹은 선비의 정신수양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땅과 기하학에 관심이 많았다. 뉴욕의 화랑이 자신에게 작가계약을 하러 접근하는 걸 싫어했다. 생활이 곤궁해졌다. 김명희는 뉴욕의 한국일보에 입사했다. 그 수입으로는 생활이 빠듯했다. ‘피놀라’라는 패션 가게를 차렸다. 이게 대박을 쳤다. 케네디 대통령의 딸 캐롤라인 케네디가 단골이 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소호에 로프트를 하나 구입했다. 백남준의 작업실이 바로 옆이고 도널드 저드의 집도 지척이었다. 스파게티로 유명한 이탈리안 레스토랑 ‘오스테리아모리니’와 굴 요리를 잘하는 프렌치 레스토랑 ‘발타자’가 이 부부가 애호하는 소호의 식당이었다. 가까운 차이나타운을 찾아가 딤섬과 만두탕을 즐겼다.

1989년 춘천 북산면 내평리 폐교로 뉴욕의 짐을 옮겨 이사했다. 나중에는 길이 났지만, 처음에는 소양호에서 배를 타고 접근해야 했다. 최첨단의 도시 뉴욕 소호와 시골 내평리를 오가는 기막힌 삶이 시작되었다. 김차섭은 2008년에 위 수술을 했다. 김명희가 환자식을 만들었다. 설탕 알레르기가 있어 블루베리를 약한 불로 조리고 설악산 꿀을 넣어 잼을 만들었다. 수학과 미술을 함께 탐닉하던 흥덕왕 36대손 경주 김씨 김차섭은 2022년, 꿀 열여덟 통을 남기고 그의 평생의 화두인 땅을 떠나 하늘로 갔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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