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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韓에 생화학실험실 꾸렸다"…러시아판 음모론 복붙한 北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일 김선경 북한 외무성 부상이 전날 제주도에서 열린 확산방지구상(PSI) 훈련을 비판하기 위해 조선중앙통신에 낸 담화에서 "미국이 남조선과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 생화학무기실험실들을 꾸려놓았다"고 주장했다. 북한이 선전 매체도 아닌 정권의 공식 창구까지 동원한 근거 없는 '가짜 뉴스'로 대남ㆍ대미 비방 공세에 열을 올린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찰위성 실패 와중 '시제'도 안 고치고 허술 보도

 지난달 31일 제주 해군기지에서 실시된 확산방지구상(PSI) 해양차단훈련 모습. 연합뉴스.

지난달 31일 제주 해군기지에서 실시된 확산방지구상(PSI) 해양차단훈련 모습. 연합뉴스.

중ㆍ러 음모론 '복붙'

북한 외무성이 이날 꺼내 든 '우크라이나 내 미국의 생화학실험실' 주장은 지난해부터 중국과 러시아가 줄곧 제기한 의혹이다. 지난해 3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실험실에서 미 국방부가 지원하는 생물 실험이 비밀리에 진행됐다는 문서를 발견했다"며 "병원균을 퍼뜨리기 위해 새, 박쥐를 활용하는 방법이 연구됐다"고 주장했다. 러시아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도 같은 주장을 이어갔고, 중국도 공식 석상 발언과 관영 매체 보도로 러시아 주장을 확대·재생산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미국은 "러시아가 문제 삼은 실험실은 코로나19 등 질병 관련 공중보건 시설"이라며 "의도가 명확한 거짓말"이라고 반박했다. 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주장을 날조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중·러의 주장은 미국 내 극우 세력이 바이든 행정부를 비난하기 위해 퍼뜨리는 근거 없는 음모론으로 악용되고 있다.

지난 2월 열린 북한 ICBM 발사에 관한 유엔 안보리 회의. AFP. 연합뉴스.

지난 2월 열린 북한 ICBM 발사에 관한 유엔 안보리 회의. AFP. 연합뉴스.

한국 내 '남남 갈등' 노렸나

북한이 이날 제기한 '한국 내 미국의 생화학실험실 운영' 주장도 근거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2019년 일부 언론과 시민단체는 "주한미군이 부산항에 생화학실험실을 두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주한미군은 "한반도 내에서 어떠한 생화학 실험도 하지 않는다"고 밝혔고, 국방부도 "세균 무기 실험실은 없으며, 관련 장비는 생물학 작용제의 실험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명확히 선을 그었다. 한ㆍ미는 북한과 생화학전에 대비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을 뿐, 그간 미군이 국내에 반입한 생화학물질도 독성을 제거한 비활성화 시료라는 입장이다.

북한이 난데없이 생화학실험실 음모론을 꺼내 든 건 미국 내 극우세력의 움직임과 유사한 '남남 갈등'의 증폭을 노렸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노림수의 배경은 지난달 31일 제주 공해 상에서 한ㆍ미ㆍ일ㆍ호 다국적군이 벌인 해양차단훈련의 내용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이번 훈련의 핵심은 화학무기 관련 의심 물질(신경 안정제)이 실린 선박을 멈춰 이를 탈취하는 내용이었다.

31일 제주 해군기지에서 열린 PSI 해양차단훈련에서 국군화생방사령부 특임대가 의심선뱍에서 의심물질을 확보하는 모습. 해군.

31일 제주 해군기지에서 열린 PSI 해양차단훈련에서 국군화생방사령부 특임대가 의심선뱍에서 의심물질을 확보하는 모습. 해군.

中 편들려 제주까지 건드려 

북한의 담화엔 의도적으로 중국과 '공동 전선'을 펼치려는 의도도 담겨 있다. 김 부상은 이날 담화에서 "(PSI) 훈련이 진행되는 곳이 영유권 문제로 인한 분쟁이 지속되고 있는 예민한 수역과 인접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PSI 훈련이 실시된 제주도 공해상이 중ㆍ일 간 영유권 분쟁이 있는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와 인접하다는 점을 문제 삼아 중국을 끌어들이려는 의도풀이된다.

그러나 이러한 북한은 노림수는 그간 "자주"와 "우리 민족 끼리"를 앞세워 외세 배격을 주장했던 것과도 배치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북한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제주도 공해상이 중국 영향권에 있음을 시사하게 된다. 이는 그동안 북한이 주장해온 '자주'가 반미 선동용이자 북한의 정권 유지 목적의 정치 구호에 불과했다는 점을 스스로 시인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실제 북한은 최근 중국과 공동 전선을 펼칠 수 있는 이슈라면 뭐든지 다 끌어오겠다는 움직임을 노골화하고있다. 김 부상은 이날 성명에서도 "미국이 '항행의 자유'를 구실로 각종 전투함선들을 대만해협에 뻔질나게 들이밀고 있다"며 PSI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대만 문제를 의도적으로 언급하며 중국의 개입을 부추기려는 의도를 내비쳤다.

31일 제주 해군기지에서 열린 PSI 해양차단훈련 모습. 뉴스1.

31일 제주 해군기지에서 열린 PSI 해양차단훈련 모습. 뉴스1.

시제도 안 맞는 표현…北 내부 혼란 반영? 

또 하나 눈에 띄는 대목은 북한이 공식 담화에 시제조차 불명확한 표현을 담았다는 점이다.

김 부상은 1일자 담화에서 이미 전날 끝난 해양차단훈련에 대해 "(한ㆍ미ㆍ일ㆍ호가) 5월 말 해상차단훈련이라는 것을 감행하려 하고 있다"는 엉뚱한 소리를 했다. 이미 써둔 담화의 시제도 고치지 않은 채 내보낼 정도로 북한이 검증 없는 공세를 펼치고 있다는 지적이다.

외교가에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직접 공들였던 군사정찰위성 발사 실패에 따라 공식 담화의 부정확한 표현도 거르지 못하고 급하게 낼 정도로 내부가 혼란한 상황일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북한이 대남·대미 공세 수위를 끌어올리기 위해 검증되지 않은 주장과 가짜 뉴스를 마구잡이로 퍼뜨릴수록 국내·외 혼란은 보다 가중될 수 있다. 정부 소식통은 "국내는 물론 유엔 등 국제 무대에서도 북한의 가짜 주장과 이를 묵인 및 지지하는 중국, 러시아의 여론전 때문에 각종 오해를 불식시키기가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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