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말 카슈끄지(Jamal Khashoggi). 사우디아라비아의 언론인이자 미국 워싱턴포스트에서 칼럼니스트로 글을 썼던 이 사람의 이름을 아는 미국인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설령 아는 사람이 많다고 해도 ‘미국 대통령’이 사우디의 언론인 1명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기 위해 미국의 국익과 패권을 포기한다면 이를 납득하는 미국인은 몇 명이나 될까?
사우디 국적의 언론인인 카슈끄지는 이른바 ‘금수저 한량’ 출신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개국한 이븐 사우드 국왕의 왕실 주치의였다. 그의 삼촌은 1980년대 세계 최고의 부호이자 무기상으로 이름을 날린 아드난 카슈끄지다. 탄탄한 집안 배경을 바탕으로 그는 미국 인디애나 주립대에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성적은 바닥이었다. 귀국 후 고향의 서점에서 일하며 친구들과 노는 것에 더 집중했던 한량이었다. 그는 가문의 조력으로 지방지 기자가 됐고 이후 사우디아라비아 정보국(GID) 연락책이 되어 아프가니스탄 전쟁 중 미국과 연을 맺었다.
카슈끄지를 띄워준 것은 9.11 테러를 일으킨 오사마 빈 라덴이었다. 그는 9.11 테러 13년 전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오사마 빈 라덴과 그가 이끄는 무자헤딘을 취재하며 이름을 알렸다. 이후엔 빈 라덴을 통해 아프가니스탄 관련 특종들을 여러 건 터트리며 언론인으로서 입지를 굳혔다. 그는 사우디 왕가에도 용비어천가를 부르며 왕실과 친한 언론인으로 승승장구를 거듭해 사우디 최대 일간지 ‘알 와탄(Al Watan)’의 편집장 자리에까지 올랐다. 이후 그는 사우디 정보부의 도움을 받아 9.11 테러 전후로 빈 라덴을 직접 만나 기사를 쓰며 서방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빈 라덴의 절친한 벗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왕래도 잦았고, 빈 라덴이 9.11 테러를 계획하고 있을 때 그와 테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었다. 그는 자신이 빈 라덴의 ‘거사’를 만류했다고 주장했지만, 빈 라덴이 3천 명 이상의 사망자와 수만 명의 부상자를 낸 인류 최악의 테러인 9.11 사건을 저지른 뒤에도 그를 ‘지하디스트’로 불렀다.
그는 철저한 기회주의자였다. 와하비즘을 비판한 칼럼을 그대로 게재해 알 와탄 편집장직에서 쫓겨난 그는 영국으로 건너가 파이살 왕자(Turki Al Paisal) 밑으로 들어갔다. 그의 권세를 업고 4년 만에 알 와탄 편집장으로 복귀하는 데 성공했지만, 공적 업무보다 개인적 명성 쌓기에 더 골몰했던 그는 폐쇄적인 사우디 왕가에 대한 비판 기사를 냈다가 알 와탄에서 다시 쫓겨났다.
이후 그는 바레인으로 건너가 새로운 뉴스 채널을 시작했고 서방 언론들과 접촉하며 사우디 왕실을 비난하면서 사우디 개혁을 주창하는 ‘진보주의자’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독실한 무슬림을 자처하며 빈 라덴을 지하디스트로 불렀던 그가 사우디 여성 인권 운동가인 루자인 알하틀룰(Loujain al-Hathloul)을 옹호하고, 미국 민주당 내 급진 세력과 어울려 사우디의 인권 문제를 비판하기도 했다.
카슈끄지는 자신의 명성과 언론 권력을 위해 테러리스트를 칭송하고 왕실에 아첨하다가 쫓겨나자 인권 운동가 행세를 하며 서방 언론의 시선을 끌었던 기회주의자다. 카슈끄지가 튀르키예 사우디 총영사관에 찾아갔던 이유도 지저분했다. 당시 그는 10살 연하의 스튜어디스 출신 내연녀 하난 엘아트르(Hanan Atr)와 24살 연하의 후배 언론인 내연녀 헤티스 센기즈(Hatice Cengiz)를 만나고 있었다. 내연녀들의 혼인신고 독촉에 못 이겨 당시 혼인관계에 있었던 두 번째 부인 알라 나지프(Alaa Nassif)와 이혼하기 위해 서류 접수 차 총영사관을 찾았던 것이 그의 마지막 행보였다.
자말 카슈끄지의 인생 그 어디에도 저널리스트로서의 양심이나 원칙은 없었다. 그는 사우디 왕실 용비어천가를 부르며 언론 권력을 누려왔고 왕실에 밉보여 쫓겨난 것에 앙심을 품고 세계 각지를 떠돌며 왕실을 비판하는 ‘언론 활동’으로 돈과 명성을 얻었다. 그는 이익에 따라 무슬림 지하디스트가 되기도, 여성인권 운동가가 되기도 했던 인물이다.
철저하게 사익(私益)을 추구했던 위선자의 예견된 죽음은 개인 입장에서는 억울한 죽음이지만 사우디아라비아 정치 영역의 일이다. 타국은 치졸한 암살을 벌인 사우디 왕실을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이 문제를 걸고넘어지며 세계 에너지 공급망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사우디와의 관계를 파탄으로 내몰 필요는 없다. 그러나 서구 사회 전반에 넓게 퍼진 ‘정치적 올바름(PC : Political Correctness)’은 카슈끄지 사건을 크게 이슈화하며 사우디 왕실을 악마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소련 정보기관 KGB 출신으로 망명 후 KGB의 활동에 대한 폭로 활동을 해온 유리 베즈메노프(Yuri Bezmenov)의 저서에 따르면, PC는 KGB가 서구 자유민주주의 진영을 전복하기 위해 기획한 장기 과제의 방법론으로 탄생했다. 베즈메노프는 KGB의 공작 목표를 “국민이 본인과 국가를 보호할 수 있는 상식적 판단을 못 하게 만드는 장기간에 걸친 세뇌”라고 규정했다.
베즈메노프는 “가장 먼저 학계를 장악하고, 학자들을 통해 학생들에게 실용적인 학문 대신 젠더 문제나 인권, 복지 같은 추상적인 관심사를 주입하는 것이 첫째”라고 말했다. 그는 “그렇게 육성된 학생들을 산업계와 언론에 침투시켜 도덕적 상대주의로 기성 정치권력과 체제를 비난하는 것으로 명성을 쌓게 한 뒤, 시간이 지나 이렇게 오염된 학생들이 사회 주류층이 되면 알아서 나라를 망쳐준다”며 KGB의 체제 전복 공작 계획을 설명했다.
그가 이러한 폭로를 내놓은 것은 40년 전인 1984년의 일인데, 결국 그의 주장대로 서구 주요 선진국들은 KGB의 공작에 의해 오염된 정치인·언론인·시민운동가·노조 등이 사회를 이끄는 주류 세대가 되어 나라를 망치고 있다. 마치 성인군자로 포장된 정치인이나 지식인 가운데는 상상도 못 할 지저분한 사생활을 가진 위선자들이 많다. 미국 체제를 비판하며 학계와 언론으로부터 ‘시대의 양심’으로 추앙받아온 놈 촘스키(Noam Chomsky) 교수가 최근 인류 역사상 최악의 아동 성범죄자 제프리 엡스타인(Jeffrey Epstein)과 어울리며 여러 의혹에 휘말린 것도 우연이 아니다.
PC는 “누가 더 착한 척하는가?”라는 단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다. 정의·인권·평등·환경 등의 이슈를 선점해 선과 악을 나누고,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절대적인 선이라고 믿으며 반대 의견을 악으로 몰아간다. PC주의자들은 크게 ‘위선자’와 ‘바보’로 구분된다. 대개 위선자들은 PC의 가면을 쓰고 말과 글로 자신을 선전해 팬덤을 만든 뒤, 이를 통해 정치적·경제적 사익을 추구한다. 바보들은 그 위선자들의 선동을 비판 없이 수용하며 위선자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은 물론 그들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워준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잘못된 사회운동과 국가 정책이 초래한 청구서를 대신 떠안고도 그것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인지조차 하지 못한다. 그러고는 자신을 ‘선한 사람’ 또는 ‘정의로운 사람’이라며 정신적으로 자위한다.
앞서 메즈메노프가 밝힌 KGB의 공작 목표, 즉 ‘본인과 국가를 보호할 수 있는 상식적 판단을 못 하게 만드는 것’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인간상이다.
카슈끄지 사건은 서방 세계의 PC주의 정치인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정의롭고 멋있는지를 보여줄 좋은 소재였다. 해당 사건을 놓고 사우디 왕실을 비난하고 저주를 퍼부으면 정의로운 시민이나 용기 있는 저널리스트라 자신을 포장할 수 있었고, 정치인은 국가 권력을 이용해 사우디와의 관계를 망친 뒤 정의를 구현한 정치인으로 자화자찬을 늘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카슈끄지가 피살된 직후 카슈끄지와 아무런 관련이 없음에도 가장 먼저 사우디에 대한 제재를 발표하며 발끈하고 나선 것은 글로벌 PC주의자들의 대모(代母),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이 이끄는 독일이었다.
애초에 메르켈은 자유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그는 1980년, 동베를린 공산당 청년단체인 자유독일청년(FDJ)에서 간부로 활동하며 청년들에게 마르크스주의를 교육하던 선전·선동 담당자였다. 메르켈 본인도 인정했지만, 그는 청년 시절 대부분을 동독 노동자연합, 독일·소련친선협회 활동으로 보냈다. 그는 독일 경제를 번영시킨 능력 있는 지도자로 포장됐지만, 그의 치하에서 독일이 번영했던 것은 애초에 제조업 중심 국가였던 독일이 유로존 출범으로 남유럽 국가들의 공산품 시장을 싹쓸이하는 수혜를 입었기 때문이지 그가 유능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PC주의를 내세운 적극적인 이민자 수용으로 독일 사회 안정을 박살 냈고 재임 기간 내내 유럽 에너지 생태계를 러시아에 종속시키며 푸틴 장기 독재의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탈원전을 통해 임기 마지막 6년간 전기 요금을 1000% 상승시켜 독일 민생 경제를 박살 냈고 산업계 전반에도 치명타를 날렸다. 본인의 실책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했지만, 우크라이나에 빼앗긴 영토를 포기하고 러시아와 협상하라는 주장을 펴 퇴임 이후 두고두고 비난을 받는 인물이다.
메르켈은 그전에는 누구인지도 잘 몰랐을 카슈끄지 때문에 독일 국민이 벌어들일 수 있었던 천문학적인 돈을 날려버렸다. 당시 독일 KMW사는 2011년부터 사우디와 전차 판매 협의를 진행 중이었고, 장기간에 걸친 협상 중에 사업 규모는 200대에서 800대까지 늘어나 있었다. 사우디가 제시한 가격은 250억 달러, 한화 33조 2000억 원이라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여기에 사우디는 독일제 소총과 기관총 등 보병 무기 4억 1600만 유로 규모의 계약도 추진했지만, 메르켈이 발표한 사우디 무기 금수 조치 때문에 독일 방산업체들은 계약서 서명 직전에 대박을 날려야 했다.
독일 육군 보유분의 2.5배가 넘는 물량의 전차를 사들이려는 사우디 계약이 날아가자 레오파르트 2 계열 전차의 가격과 유지비도 폭등해 메르켈 임기 중 독일군 전차 가동률은 매년 바닥을 쳐 안보에도 구멍이 났다.
메르켈은 카슈끄지 사건 이전에 영국이 사우디와 체결한 유로파이터 타이푼 전투기 구매 계약도 가로막았다. 독일이 유로파이터 공동 개발국이고, 유로파이터에 독일제 부품이 들어간다는 이유에서였다. 영국이 외무장관을 보내 메르켈을 설득했지만, 독일은 요지부동이었고 이듬해 사우디 무기 금수 조치를 추가 연장하기까지 했다.
한술 더 떠 메르켈은 빈 살만 왕세자를 겨냥해 “모든 진실이 공개되고 범죄자들이 법의 심판을 받게 되기까지 갈 길이 멀다”면서 “각국 정상들과 이번 사태에 대한 공동 대응 방안을 계속 협의할 것”이라고 선언해 사우디의 분노를 샀다. 이 일로 독일은 2022년 우크라이나 사태 후 처음으로 맞는 겨울의 에너지 대란 공포 때 올라프 숄츠 총리가 직접 사우디로 건너가 무기 금수를 풀겠다며 빈 살만 왕세자에게 사정해야 했다.
그러나 결국 천연가스 공급 계약을 수락받지는 못했고 그해 겨울 독일 국민은 각각 2배, 5배 폭등한 전기 요금 고지서와 가스 요금 고지서를 받아야 했다. 독일 국민은 고통을 받고 있지만, 퇴임 후 메르켈은 회당 10~20만 달러의 강연료를 받으며 강연을 다니고 있고, 매달 1만 5000유로를 받으며 여유로운 노년을 만끽하고 있다. 퇴임 직전 당국에 신고한 그의 공식 자산은 1150만 달러에 달한다.
PC주의 때문에 카슈끄지 사건을 들먹이다가 사우디와의 관계가 박살 나고 경제적으로도 타격을 입은 나라는 독일만이 아니다. 독일이 경제적으로 데미지를 입었다면, 미국은 바이든의 ‘PC 놀음’에 미·중 패권 경쟁에서 중국에게 패권을 빼앗길지도 모르는 위기로 내몰리게 됐다.
카슈끄지 사건이 발생한 2018년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재임 기간이었다. 당시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카슈끄지 사건에 대해 우려를 표하기는 했지만, 사우디 정부를 대상으로 한 제재나 법적·행정적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도덕적으로 비판해야 할 사건임은 분명했지만, 해당 사건으로 사우디와의 관계를 파탄 내는 것은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 바이든 대통령은 달랐다. 그는 집권 직후 연방수사국(FBI)의 기밀문서를 공개하며 9.11 사건에 사우디 정부가 연루됐다는 주장을 꺼내며 사우디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사우디에 연일 미사일을 쏴대는 후티 반군의 배후였던 이란의 핵무장을 방관하며 사실상 실패한 것으로 평가되던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 Joint Comprehensive Plan of Action) 복원도 선언했다.
곧이어 카슈끄지 사건을 들고나오며 빈 살만 왕세자를 자극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빈 살만 왕세자에게 책임을 묻겠다며 전임 행정부 때 묻혔던 내연녀 헤티스 센기즈의 소송을 법정에 올렸다. 법적으로 카슈끄지와 아무런 관련이 없던 센기즈는 빈 살만 왕세자가 자신의 ‘약혼자’를 죽여 정신적·물질적으로 손해를 입었다며 소위 ‘인권단체’들과 빈 살만 왕세자를 상대로 ‘민사’ 소송, 즉 손해배상금을 내놓으라는 소송을 걸었다.
바이든 행정부는 이란이 고농축 우라늄을 생산 중인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JCPOA 복원을 선언해 사우디의 반발을 사더니, 사우디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중동 지역에 상시 배치된 항공모함을 철수시키고 제5함대 상시 배치 순찰 전력도 없애버렸다. 호르무즈 해협과 오만만 일대에서 미 해군이 사라지자 이란과 후티 반군의 무기 거래는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이에 따라 사우디를 겨냥한 후티의 미사일·드론 공격도 급증했다.
사우디는 미국을 성토했지만, 바이든 대통령은 카슈끄지 타령을 하며 사우디 수도 리야드가 후티의 탄도탄 공격을 받는 와중에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THAAD)와 패트리엇 PAC-3 포대를 본토로 복귀시켰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 체결된 무기 거래 계약 이행도 잠정 중단했고 후티의 미사일 공격이 급증해 패트리엇 미사일 재고가 떨어진 사우디의 미사일 긴급 공급 요청도 묵살했다.
아랍권에는 ‘키사스(Qisas)’라는 관습법이 있다. 아랍어로 보복을 의미하는 키사스는 이른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원칙을 적용한 이슬람의 형벌 관습을 말한다. 아랍에는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보답하고 해를 당하면 반드시 그에 상응한 보복을 해야 한다는 관습이 있다. 사우디가 미국에게 보복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고 미국에 보복을 결심했다면 가장 먼저 미국의 적과 손을 잡는 것이 이치다. 그렇게 사우디가 잡은 손이 바로 중국의 손이었다.
내일 (下)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