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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랑GO] 서울에서 떠나는 선사시대로의 시간 여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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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심심해~”를 외치며 꽁무니를 따라다닌다고요? 일기쓰기 숙제를 해야 하는데 ‘마트에 다녀왔다’만 쓴다고요? 무한고민하는 대한민국 부모님들을 위해 '소년중앙'이 준비했습니다. 이번 주말 아이랑 뭘 할까, 고민은 ‘아이랑GO’에 맡겨주세요. 이번엔 신석기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서울 강동구 암사동 유적에 가봤습니다.

소중 학생기자단이 서울 암사동 유적에서 신석기 시대에 대해 알아봤다. 신석기 시대는 원시적 농경과 정착 생활의 시작, 간석기 이용 등으로 인류의 삶이 구석기 시대에 비해 크게 바뀌었다고 해서 신석기 혁명이라고도 한다.

소중 학생기자단이 서울 암사동 유적에서 신석기 시대에 대해 알아봤다. 신석기 시대는 원시적 농경과 정착 생활의 시작, 간석기 이용 등으로 인류의 삶이 구석기 시대에 비해 크게 바뀌었다고 해서 신석기 혁명이라고도 한다.

신석기인들의 일상은 어땠을까  

신석기란 인류가 지구에 출현한 직후부터 인간의 역사가 글자로 기록되기 직전까지의 시대를 말한다. 한반도를 기준으로 지금으로부터 약 70만 년 전부터 시작된 선사시대는 구석기·중석기·신석기·청동기로 구분할 수 있다. 특히 약 1만 년 전부터 시작된 신석기는 인류가 움집에 살면서 농사를 짓기 시작하고, 토기와 저장고에 식량을 비축하는 등 본격적인 정착 생활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한반도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와 비슷한 모습이 된 것도 바로 이 시기다.

멀게는 약 1만 년부터 가깝게는 수천 년 전의 이야기라서 생소하게만 느껴질 수 있지만, 신석기 시대의 흔적은 지금도 우리나라 곳곳에 남아있다. 2022년 기준 전국에서 400곳 이상의 신석기 유적이 발굴됐다. 서울에도 한강 유역의 대표적인 신석기 시대 집터 유적인 암사동 유적이 있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 최대 규모의 마을이 형성됐던 곳이다. 신석기는 초창기(BC 8000~6000)·조기(BC 6000~4500)·전기(BC 4500~3600)·중기(BC 3600~2500)·후기(BC 2500~1500)로 나눌 수 있는데, 서울 암사동 유적은 신석기 전기 한반도 중서부 지방에서 많이 출토된 빗살무늬 토기로 잘 알려져 있다. 한강변에 위치한 최초의 대규모 집단 정착 생활, 신석기 시대를 대표할 만큼 완성도 높은 빗살무늬 토기 출토 등이 특징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79년 사적 제267호로 지정됐다.

서울 암사동 유적 유구 보호각에 재현된 신석기 시대 집터. 원형에 가까운 방형인 경우가 많지만, 모서리가 둥근 사각형 모양인 말각방형도 있다.

서울 암사동 유적 유구 보호각에 재현된 신석기 시대 집터. 원형에 가까운 방형인 경우가 많지만, 모서리가 둥근 사각형 모양인 말각방형도 있다.

서울 암사동 유적에는 땅을 둥글게 혹은 네모나게 파놓은 여러 구덩이가 있다. 바로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거주한 움집터 유구(遺構)다. 2016~2017년 실시된 학술발굴조사를 통해 불에 탄 신석기 시대 주거지 8기를 발견했다. 일반적으로 땅을 파서 화덕·저장 시설 등을 내부에 마련하고, 상부에 지붕을 덮은 구조의 살림집, 움집터다. 집터는 원형에 가까운 방형(方形)인 경우도 많지만, 모서리가 둥근 사각형 모양인 말각방형(抹角方形)으로도 만들었다.

움집은 집터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가로로 도리를 올린 뒤 서까래까지 얹어 지붕을 씌운 구조다. 멀리서 보면 고깔 모양처럼 생겼다. 실내 중앙에는 화덕이 있고, 화덕에서 나온 연기를 밖으로 빼내기 위해 꼭지 아래에 까치구멍이라고 불리는 환기 시설이 있다. 집 내부 중앙에 불을 피울 수 있는 화덕(노지)은 신석기에 지어진 집의 특징이기도 하다. 화덕 덕분에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음식을 따뜻하게 조리하고, 추위와 사나운 짐승을 피할 수 있었다.

소중 학생기자단이 서울 암사동 유적에 복원한 신석기 시대 움집을 둘러봤다. 움집은 멀리서 보면 고깔처럼 생겼다.

소중 학생기자단이 서울 암사동 유적에 복원한 신석기 시대 움집을 둘러봤다. 움집은 멀리서 보면 고깔처럼 생겼다.

암사동 선사유적 박물관에서는 신석기 암사동 주변 환경부터 움집 안에 어떤 물건이 있었는지 등을 살펴볼 수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복원된 빗살무늬 토기다. 빗살무늬 토기란 포탄형 또는 반계란형으로 생긴 몸체에 음각으로 기하학적인 무늬를 새겨 넣은 토기다. 신석기 시대 인류는 한곳에 정착하면서 채집·사냥·물고기잡이 등으로 얻은 식량을 보관하고 조리하기 위해 토기를 만들었다. 동아시아에서는 BC 약 1만5000년, 그 외 지역에서는 BC 1만 년을 전후로 세계 각지에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른 시기에 제작된 토기는 바닥이 편평하고 무늬가 없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릇을 모래나 땅에 박아서 고정할 수 있도록 바닥이 뾰족해졌고 문양과 형태를 표면에 새기기 시작했다. 빗살무늬 토기는 신석기 시대 전기(BC 4500~3600년) 한반도 중서부 지방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퍼졌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 동북 지방과 일본·시베리아·북유럽에서도 비슷한 형태 토기가 나타난다. 빗살무늬외에도 무지개무늬·번개무늬 등 다양한 무늬가 있지만 각 문양의 의미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아직 밝혀지지는 않았다.

신석기 시대 토기는 기원전 1만 년을 전후한 시기에 세계 각지에서 출현하였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이보다 약 5000년 앞서 토기를 제작했다.

신석기 시대 토기는 기원전 1만 년을 전후한 시기에 세계 각지에서 출현하였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이보다 약 5000년 앞서 토기를 제작했다.

우리나라의 토기 형태와 문양을 기준으로 크게 동북·서북·중서부·남부 4개의 문화권으로 구분한다. 동북·서북 지방은 바닥이 평평한 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중서부·남부 지방은 바닥이 뾰족한 토기가 주류다. 신석기 시대 초창기 대표 유적인 제주도 고산리 유적에서는 바닥이 평평하고 식물성 섬유질을 다량 섞은 문양이 없는 토기가 발견됐다. 신석기 조기(BC 6000~4500)에 나타나는 토기는 주로 동북과 남부지방의 해안가와 섬 지역 유적에서 발견되는데, 점토띠를 표면에 붙여서 만든 덧무늬토기가 대표적이다. 신석기 전기(BC 4500~3600)에는 바닥이 둥글거나 뾰족하고 전면에 빗살무늬가 새겨진 토기가 주류를 이룬다. 중기(BC 3600~2500)에는 다양한 문양의 빗살무늬 토기가 나타난다. 신석기 후기‧말기(BC 2500~1500)에는 토기에 무늬가 새겨지는 면적이 크게 줄어 입술 부분에만 새겨지거나, 거칠고 엉성하게 그려진 토기가 많이 나타난다.

토기는 크게 흙 채취 및 준비→모양 만들기→표면 다듬기와 무늬 새기기→건조→굽기(소성) 과정을 거친다. 먼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흙을 물에 개어 잘 반죽한다. 여기에 돌가루나 조갯가루를 섞으면 더욱 튼튼한 토기를 만들 수 있다. 두 번째로 둥근 진흙띠 여러 개를 똬리 모양으로 쌓아 올리는 테쌓기 기법이나, 긴 진흙띠를 나선형으로 감아올려 그릇 모양을 만드는 서리기 기법으로 모양을 만든다. 크기가 작은 토기는 이 과정을 생략하고 손으로 빚을 수도 있다. 세 번째로 토기 표면을 손으로 두드리거나 나무칼·조가비·둥근 자갈 등으로 긁어내 다듬는다. 모양이 완성되면 나뭇가지·동물 뼈·조가비 등으로 누르거나 그어서 표면에 무늬를 새긴다. 마지막으로 불을 지펴 토기를 구우면 빗살무늬 토기 완성. 신석기 시대에는 가마가 없었기 때문에 야외에서 불을 지펴 토기를 구웠다. 공기와 접촉한 상태로 구워진 빗살무늬 토기는 붉은빛이 도는 경우가 많고, 밀폐된 가마에서 구운 도기에 비해 강도도 약하다.

서울 암사동 유적에서는 박물관 관람 외에 빗살무늬 토기 조각 맞추기 체험도 할 수 있다.

서울 암사동 유적에서는 박물관 관람 외에 빗살무늬 토기 조각 맞추기 체험도 할 수 있다.

원시적 농경의 시작과 토기·간석기의 사용은 구석기와 신석기를 구분하는 기준이다. 구석기 시대에는 돌을 쳐서 깨뜨리거나 떼어내서 크기와 형태를 조절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반면 신석기 시대에는 돌을 갈아서 원하는 형태를 만드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덕분에 이전보다 더 날카롭고 정교한 도구, 간석기를 만들 수 있었다.

간석기는 날 부분을 정교하게 만들어 도구의 효율성을 증대시키기도 했고, 뗀석기보다 다양한 도구를 제작하여 문화의 발달로 이어지기도 한다 간석기의 큰 장점 중 하나는 석기를 사용하다가 파손되거나 마모되면 재가공하여 다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석기는 사용할수록 전체적인 형태가 변화하고 그 크기가 작아지기 때문에 재가공 시 다른 용도의 석기로 제작되는 경우도 있다.

신석기인들이 거주하던 움집 내부에서는 도토리 등 당시 사람들이 생활 흔적이 함께 발견된다.

신석기인들이 거주하던 움집 내부에서는 도토리 등 당시 사람들이 생활 흔적이 함께 발견된다.

박물관에는 농경 및 수렵‧어로 활동에 사용된 간석기들이 전시돼 있다. 사냥할 때 쓰던 돌화살촉과 돌창, 물고기를 잡기 위해 그물을 던질 때 쓰던 그물추, 땅속을 뒤져 식물의 뿌리나 열매를 캐는 데 쓰던 뒤지개, 농사지은 곡식의 대를 벨 때 쓰던 돌낫, 낟알의 껍질을 벗기거나 열매를 갈 때 사용하던 갈판·갈돌 등이 눈에 들어왔다.

신석기 암사동 지역은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다양한 야생 동식물이 살 수 있는 환경이 됐다. 연구에 따르면 신석기 시대 한강 생태계는 우리가 사는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암사동 유적에서 출토된 목탄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침엽수인 소나무·가문비나무 종류와 낙엽 활엽수인 참나무·느릅나무·벚나무 종류가 자라고 있었다. 또 참나무의 열매 도토리가 탄화된 것도 많이 발견됐다. 당시 이곳에서 살던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도토리를 채집해 식량으로 삼았다는 증거다.

신석기 시대 한반도는 온난화 현상으로 해수면이 차차 높아지고, 새로운 동식물이 나타났다. 빙하기에 살던 매머드 등 대형 동물들이 따뜻해진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멸종한 뒤 사슴·소·멧돼지 중소형 포유류 등이 출현했다. 또 오리류·고니류·기러기류 등 각종 철새는 물론 꿩과 같은 텃새도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서식했는데, 이들은 암사동 유역에 살던 신석기인들의 중요한 식량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먹잇감이 풍부해진 덕분에 신석기인들은 도구들을 활용해 농사를 짓거나 사냥하고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한곳에 정착할 수 있었다.

신석기 시대 움집의 특징은 집 내부 중앙에 불을 피울 수 있는 화덕(노지)이다. 화덕 덕분에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음식을 따뜻하게 조리하고, 추위와 사나운 짐승을 피할 수 있었다.

신석기 시대 움집의 특징은 집 내부 중앙에 불을 피울 수 있는 화덕(노지)이다. 화덕 덕분에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음식을 따뜻하게 조리하고, 추위와 사나운 짐승을 피할 수 있었다.

박물관을 나와 움집들이 모여있는 체험마을을 지나면 보이는 체험교실에서는 빗살무늬 토기 조각들을 조립해 볼 수 있다. 쉬워 보이지만 서로 아귀가 맞는 조각을 찾아 빈틈없이 맞추는 작업은 꽤 인내심이 필요하다.

기후와 자연환경 변화로 인해 신석기 시대에 시작된 정착 생활과 농경은 잉여 식량과 인구 증가로 이어졌으며, 이는 청동기와 철기시대에 국가와 문명이 탄생하는 토대가 됐다. 이때부터 축적됐던 여러 기술과 사건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모여서 오늘날 우리가 사는 현재가 됐다. 너무 멀게만 느껴지던 신석기 시대를 서울 암사동 유적에서 가깝게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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