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중앙시평

거부권에 갇힌 민주당의 부조리 정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이현상 논설실장

이현상 논설실장

승산 없는 싸움인 줄 알면서 운명에 도전하는 인간에겐 비장미가 있다. 알베르 카뮈가 수필 ‘시시포스 신화’에서 조명한 부조리의 철학이다. 그러나 국민의 삶을 개선하겠다는 정당이 무망한 싸움을 반복한다면 어떨까. 자신들의 정치 철학을 과시하고 지지 기반을 넓히는 효용이 있다면 그나마 이해할 수 있다. 상대에 가할 타격만 생각하면서 자기가 입는 내상은 아랑곳하지 않는 자해의 셈법이라면. 이건 비장미도 뭣도 아니다. 그냥 부조리일 뿐이다.

실패 알면서 덤비는 시시포스인가
최선 힘들면 차선 모색이 책임정치
대안 정당의 이미지만 갈수록 훼손
대통령실도 자제의 덕성 발휘해야

“이 법에 정부와 여당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입법부로서는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내려야 했다.” 5월 24일 민주당 소속 전해철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이 노란봉투법의 본회의 부의 요구안 표결을 강행하면서 한 말이다. “옳든 그르든 답이 있어야 책임지는 것이 입법부의 역할”이라는 언급도 덧붙였다. 무슨 말일까. ‘그른 답’이라도 일단 내놓으면 책임을 다했다는 이야기인가. 이거야말로 ‘면피 정치’ ‘알리바이 정치’ 아닌가. 파업 장려법이라는 이 법이 용산의 문턱을 넘을 수 있다곤 전 위원장도 생각지 않았을 터다. 굴러내릴 줄 알면서도 밀어 올린 시시포스의 바위인가. 비장미는커녕 자기 합리화만 보인다.

21대 국회 후반기 들어 법사위 심사를 건너뛰고 본회의에 직회부된 법안은 모두 11건이다. 역대 가장 많은 숫자다. 이미 양곡법, 간호법은 대통령 거부권 문턱에서 폐기됐다. 노동조합법(노란봉투법), 방송법, 화물자동차법(안전운임제) 개정안도 비슷한 길을 밟을 공산이 크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윤석열 대통령이 이들 논란의 법안에 서명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임기가 끝나도 당장 사정이 바뀌기는 어렵다. 내년 총선 결과가 야당에 유리하게 나온다는 보장이 없다. 툭하면 국회 일을 법대(法臺)로 가져가는 ‘정치의 사법화’가 문제지만, 사법 환경도 야당에 녹록지 않다. 윤 대통령 임기 중 대법관과 재판관 상당수가 교체될 법원과 헌법재판소는 점점 보수적 색채가 짙어질 게 뻔하다. 상황이 이렇다면 타협을 통해 차선이라도 모색하는 게 원내 1당의 책임 정치 아닌가. 베버식 표현대로라면 ‘신념 윤리’를 위해 ‘책임 윤리’를 저버린 꼴이 됐다. 당 대표 안위에 매달리는 당 상황을 생각하면 그 ‘신념’조차 의심스럽지만.

민주당은 특정 직역의 표도 겨냥하면서 대통령은 정치적 궁지로 몰아넣는 ‘일석이조’를 노렸다. 효과가 있을까. 간호법은 의사 표보다 간호사 표가 더 많다는 계산에서 강행됐지만, 간호사 숫자의 두 배 가까운 간호조무사들을 돌아서게 했다. 물리치료사·응급치료사 등의 다른 직역 의료단체가 민주당을 보는 눈도 싸늘해졌다. 벼농사 농업인, 노조, 간호사 등 특정 직역 편을 드는 과정에서 균형과 보편성을 잃어버린 모습이 과연 중도층에 어떻게 비칠지도 생각해볼 일이다.

우락부락 입법 과정에서 대안 정당 이미지가 훼손되는 것이 민주당으로선 더 큰 손실이다. “진보라고 꼭 도덕성을 내세울 필요가 있느냐”는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켰던 양이원영 의원은 “통치세력으로서 유능함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었다”고 해명했다. 대통령 거부권 앞에서 소리 나지 않는 도돌이 연주만 거듭하는 정당에 썩 어울리는 발언은 아닌 듯하다. 신화에 따르면 시시포스를 쉼 없는 도로(徒勞)로 내모는 것은 복수와 징벌의 여신 에리니에스의 채찍질이라고 한다. 민주당을 끝없이 부조리로 모는 세력은 누구인가.

대통령의 거부권은 입법부와 행정부의 견제와 균형을 위한 장치다. 1787년 미국 필라델피아 제헌회의에 참가한 독립 13개 주 대표들은 인류 사상 새로운 정치 체제인 대통령제에 합의하면서 거부권이란 무기를 그 자리에 부여했다. 군주제 회귀에 대한 강한 경계심에도 불구하고 행정 수반에게 강력한 헌법상 권리를 인정했다. 의회가 민중의 대의기구임은 분명하지만, 무소불위 입법부가 민주주의를 해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행정 수반이 ‘입법부가 제정한 법률의 암호해독자’(제임스 매디슨의 표현) 역할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헌법에 보장된 장치라고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목숨을 걸고 침을 쏘는 벌처럼 거부권은 신중하게 행사되는 것이 맞다. 헌법기관이 자신에게 부여된 권한을 자제할 줄 알아야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법이다(대니얼 지블랫 하버드대 교수). 경위야 어떻든, 대의 기구인 국회의 결론을 국민의 또 다른 대표인 대통령이 거부하는 장면은 보통 상황이 아니다. 그 자체로 집권 세력의 부담이다. 미 제헌회의 13개 주 대표들이 결국 대통령제에 합의한 것은 그 자리의 첫 번째 주인공이 조지 워싱턴이란 ‘덕성의 정치인’이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권 세력으로서는 야당이 쳐놓은 거부권의 덫에 빠지지 않으려면 자제와 인내, 대화와 타협이라는 ‘덕성’을 발휘해야 한다. 야당의 불모(不毛) 정치와 차별화하는 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