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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딥페이크 선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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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형수 기자 중앙일보 기자
박형수 국제부 기자

박형수 국제부 기자

올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선거였던 튀르키예 대선이 끝났다. ‘21세기 술탄’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현 대통령이 3선에 성공하며 최소 5년(2028년), 최장 10년(2033년) 더 집권할 수 있게 됐다. 그는 이미 총리로 11년, 대통령으로 9년을 통치한 터다. 외신은 그의 30년 집권을 현실로 받아들이며 ‘사실상 종신 집권’이라 전했다.

여론조사에선 에르도안의 패색이 짙었다. 튀르키예 역사상 처음 6개 야당이 공동 후보로 추대한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후보의 지지율은 50%를 넘나들었다. 살인적인 고물가, 사망자 5만여 명을 낸 대지진 등도 ‘에르도안 심판론’을 부추겼다. 선거 직전, 지지율 3위였던 야권 후보 무하렘 인제가 ‘섹스 비디오’ 스캔들에 휘말려 사퇴하자 클르츠다로을루가 1차에서 과반 득표해 당선 확정될 것이라는 예측도 있었다.

일부 현지 매체는 이변의 원인을 ‘딥페이크(인간 이미지 합성 기술)’라 지목했다. 실제로 튀르키예 선거에선 가짜 영상이 판을 쳤다. 1차 투표 직전, 에르도안이 공개한 영상이 대표적이다. 해당 영상에선 클르츠다로을루의 유세 장면과 쿠르드노동자당 창립 멤버인 무라트 카라일란의 응원 모습이 이어졌다. 도이체벨레는 “아무 연관 없는 영상 두 개를 이어 붙인 가짜”라 했지만, 클르츠다로을루가 ‘테러리스트’의 지원을 받는다는 메시지는 강력했다.

선거 기간 클르츠다로을루가 “에르도안은 신이 내린 지도자다. 그가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호소하는 영상도 화제였다. 하단엔 딥페이크임을 밝히는 한 줄 문구가 적혔지만, 대다수 유권자는 영상에만 주목했다. 인제 후보를 사퇴시킨 ‘섹스 비디오’ 역시 딥페이크라는 주장도 나왔다. 야권에선 선거 기간 내내 “러시아가 AI와 딥페이크로 선거에 개입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내년엔 한국 총선, 미국 대선이 이어진다. 벌써 바이든 대통령이 등장하는 딥페이크 영상이 확산 중이다. 전문가들은 AI발(發) 가짜 뉴스를 방어할 기술적 방법은 아직 없다고 말한다. 기댈 건 유권자의 역량이다. 최근 “뉴스 신뢰도를 참·거짓이 아닌, 정치성향을 기준으로 판단할 때 가짜 뉴스에 쉽게 낚인다”는 조사 결과가 있었다. AI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자기모순의 함정에서부터 벗어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