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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조가 있는 아침

(177) 서산에 해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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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서산에 해지고
이휘일(1619∼1672)

서산에 해지고 풀 끝에 이슬 난다
호미를 둘러메고 달 띠어 가자스라
이 중의 즐거운 뜻을 일러 무삼하리오
-존재필첩(存齋筆帖)

고향으로 돌아가자

존재 이휘일(李徽逸)의 어머니는 최초의 한글 요리서인 『음식디미방』을 지은 장계향이다. 그는 외할아버지 경당 장흥효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퇴계학파의 적통을 계승하였다. 뒤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는 모두 8수로 된 연시조를 남겼다. 풍년을 기원하는 원풍 1수와 춘사, 하사, 추사, 동사의 4수, 그리고 신사(晨詞), 오사(午詞), 석사(夕詞) 3수로 구성되어 있다. 소개한 시조는 석사, 즉 저녁의 노래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즐거움을 그리고 있다.

서산에 해가 넘어가니 벌써 풀 끝에 이슬이 묻어나네. 호미는 둘러메고 달을 등 뒤에 두고 가자꾸나. 하루 농사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즐거움을 말해 무엇하리오.

옛 선비들은 전원생활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다. 농경문화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오늘날에는 건강을 이유로 전원을 찾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이유 외에도 은퇴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수구초심(首丘初心)의 전통도 아름다운 일이다. 여생을 고향에 봉사함도 값진 후반생이 아니겠는가.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