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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쿠리 투표, 옆구리 채용…'견제 무풍지대' 선관위 추락 [view]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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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헌법에 명시된 독립기관인 중앙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가 1963년 창설 이후 60년 만에 최대 위기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일파만파로 번지는 직원 자녀 특혜채용 의혹과 해킹 보안점검 거부 논란으로 견제받지 않는 헌법기관의 민낯이 여지없이 드러나면서다.

박찬진 사무총장(장관급)과 송봉섭 사무차장(차관급)이 지난 25일 동반 퇴진한 데 이어 책임론의 불길이 노태악  중앙선거관리위원장으로 옮겨붙고 있다.

박 총장과 송 차장의 딸은 각각 광주광역시 남구청과 충남 보령시청 지방직 공무원으로 근무하다 2022년과 2018년 선관위 경력직으로 채용돼 이른바 ‘아빠 찬스’ 의혹이 불거진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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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을 포함해 김세환 전 사무총장과 신우용 제주 선관위 상임위원, 윤재현 전 세종 선관위 상임위원, 김정규 경남 선관위 총무과장 등 전·현직 고위 간부 6명 외에 4·5급 직원의 자녀까지 10여 건의 채용 사례가 나왔다. 전수조사가 마무리되면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노 선관위원장은 30일 긴급 위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선관위 과천청사를 방문한 자리에서 “국민께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위원회 입장을 내일(31일) 밝히겠다”고 덧붙였다.

선관위는 박 총장과 송 차장에 대해 이르면 31일 국가공무원법 위반 혐의로 수사 의뢰하는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다. 그 외 관련 직원들에 대해선 징계와 수사 의뢰를 동시에 병행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중앙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자녀 특혜채용 의혹을 조사 중인 선관위 특별감사위원회(위원장 조병현)는 내부 조사 결과 박 총장과 송 차장이 자녀 채용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긴 어렵다는 잠정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특별감사위는 31일 선관위에 수사 의뢰 안건을 올려 재가를 받겠다는 방침이다.

소쿠리 투표에 아빠찬스까지…자정능력 상실한 선관위

노태악 중앙선관위원장(가운데)이 30일 과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고위직 간부들의 자녀 특혜 채용 의혹 관련 대응 방안 등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긴급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뉴스1]

노태악 중앙선관위원장(가운데)이 30일 과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고위직 간부들의 자녀 특혜 채용 의혹 관련 대응 방안 등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긴급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뉴스1]

선관위 고위 관계자는 “자체 조사 결과 수사로 밝혀져야 할 사안”이라고 말했다. 채용에 관여한 일부 선관위 직원이 해당 직원 아버지가 선관위 고위직임을 알고 있었다는 진술도 확보했다고 한다.

국민의힘 전봉민 의원실에 따르면 충북 선관위의 ‘2018년 경력 경쟁채용 시험 실시 계획’ 내부 문건에 송 차장 자녀의 인적사항이 기재돼 있어 채용 절차가 시작되기 전 내정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추가로 제기됐다.

특별감사위는 박 총장과 송 차장에 대한 조사도 진행했는데, 두 사람 모두 “부당한 개입은 없었다”며 혐의를 부인하는 상태다. 두 사람은 31일 면직될 예정이다.

이와 관련해 정우택 국회부의장은 페이스북을 통해 “의원면직을 하면 공직 재임용이나 공무원 연금 수령에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며 “제 식구 봐주기 특혜 면직”이라고 비판했다.

박찬진

박찬진

대통령실은 이른바 ‘면피용 면직’과 관련해 법률 검토를 진행했다고 한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선관위 사무총장과 사무차장은 모두 정무직 공무원으로 국가공무원법상 사퇴를 막을 방법이 없다”며 “현행법 개정이 없다면 똑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선관위의 위상 추락은 독립성을 방패 삼아 외부 감시의 사각지대에 안주해 자정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세계선거기관협의회(A-WEB) 설립과 K선거 수출 같은 외형적 위상 강화에만 치중한 나머지 내부 관리에 실패했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나온다.

지난해 3월 대통령선거 사전투표 과정에서 등장한 ‘소쿠리 투표함’이 대표적 사례다. 당시 선관위는 헌법상 독립기구라며 감사원 직무감사를 거부했다.

최근에는 북한 해킹 공격 시도에 대한 국가정보원 보안점검 권고를 거부했다가 물의를 빚자 뒤늦게 수용 쪽으로 입장을 바꾸기도 했다.

송봉섭

송봉섭

그런가 하면 2021년 4·7 재보궐선거에선 특정 정당(민주당)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내로남불·무능·위선’ 문구 사용을 금지했다가 지난해 대선에선 ‘주술·굿당’ 표현을 허용해 정치적 편향 논란도 불렀다.

조진만 덕성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1960년 3·15 부정선거의 여파로 1962년 개헌 당시 선관위는 내무부(현 행정안전부) 소속에서 헌법적 독립기관으로 승격됐다”며 “독립성을 지나치게 내세우다 보니 입법부·사법부·행정부의 견제를 받지 않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선관위는 차기 사무총장에 대한 자체 청문회 개최 등 검증 장치 강화를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공개 검증 장치가 없어 도덕성 논란이 불거졌다는 게 선관위 진단이다. 선관위 사무총장은 장관급이지만 국회 인사청문 대상이 아니다.

아울러 선관위는 ‘사무총장 추천위원회’ 설치도 검토하고 있다. 이를 두고 외부 수혈론과 무관치 않다는 해석이 뒤따른다. 선관위 관계자는 “리더십과 강단을 모두 갖춘 분을 시간을 두고 신중하게 물색할 것”이라고 말했다.

관건은 뼈를 깎는 쇄신 노력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느냐다. 땜질식 처방으론 신뢰를 회복하기 어렵다.

당장 내년 총선이 10개월여 앞으로 다가왔다. 중차대한 시기에 선거 관리기관의 공정성이 흔들리면 선거 결과에 불신을 초래해 큰 혼란이 빚어질 수도 있다.

선관위 전직 고위 관계자는 “과감히 도려낼 부분은 도려내더라도 대다수 직원은 코앞으로 다가온 내년 4·10 총선 관리에 매진할 수 있도록 사태를 조속히 수습하는 게 급선무”라고 말했다.

▶선거제도 개편 ▶선거구 획정은 물론 ▶선거여론조사 개선 ▶AI·가짜뉴스 대응 방안 마련 등 할 일이 산더미인데 이번 사태에 조직 전체가 손을 놓고 있어선 안 된다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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