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상렬의 세계경제전망

미·중 패권 다툼 속 일본의 지정학적 매력 부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2면

이상렬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일본 증시 뜨거워진 이유

이상렬 논설위원

이상렬 논설위원

최근 세계 경제의 핫 뉴스는 일본 증시의 부활이다. 얼마 전 히로시마에서 열렸던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지구촌의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진 상황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도쿄 증시 33년만에 최고치 경신 #연일 외국인 자금 쏟아져 들어와 #경기회복ㆍ금융완화ㆍ엔저 효과 #주주환원 정책에 ‘버핏 효과’까지 #중국성장 누릴 대체 투자처 각광 #고령화·국가부채 등 과제도 산적

일본 도쿄증권거래소(TSE) 1부의 우량주로 구성된 닛케이 225지수(닛케이 평균주가)는 지난 30일 3만1328.16엔으로 마감해 약 33년만의 최고치 기세를 이어갔다. 닛케이 지수는 올해 들어서만 20% 넘게 상승했다. 도쿄 증시 1부를 모두 반영한 토픽스(TOPIX) 지수 역시 연일 30여 년만의 최고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마치 증시에 불이 붙은 것 같다. TSE에 따르면 외국인 순매수(매수〉매도)는 5월 둘째 주까지 7주 연속 이어지면서 순매수 규모가 3조엔에 육박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1990년대 초 버블 붕괴 후 진행돼온 ‘잃어버린 30년’이 이제 막을 내린 것일까. 일본 경제 전체로 보면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러나, 증시만 놓고 보면 확실히 분위기가 달라졌다.
도쿄 증시 급등의 원인은 복합적이다. 뱅크 오브 싱가포르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만수르 모히-우딘(MansoorMohi-uddin)은 3가지로 정리했다.

닛케이 지수 올해 20% 이상 상승
우선 경기회복이다. 올 1분기 일본의 국내총생산(GDP)은 전 분기보다 0.4% 성장했다. 시장 예상(0.1%)을 뛰어넘었다. 이 추세가 1년간 이어진다고 가정해 산출하는 연율로는 1.6%나 된다. 국제통화기금(IMF)이 1.5% 성장을 전망한 한국 경제를 능가할 수 있다. 일본 경제가 플러스 성장으로 돌아선 것은 세 분기 만이다. 경기회복은 기업의 실적 개선을 의미한다. SMBC닛코증권에 따르면 일본 상장기업 1308곳의 2022회계연도(2022년 4월~2023년 3월) 영업이익은 전년보다 4.2% 늘어 역대 최대를 기록할 것으로 추정됐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둘째, 일본 중앙은행(BOJ)의 초금융완화 정책 지속이다. 지난 4월 취임한 우에다 가즈오(植田和男) 총재는 전임자인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의 돈 풀기 정책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10년물 장기 국채 금리를 거의 0%로 묶어두는 수익률곡선통제(YCC)도, 기준금리 마이너스 0.10%도 구로다 시절과 같다. 아베노믹스의 집행관이었던 구로다가 떠나면 초금융완화가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는 증시의 우려를 말끔히 해소했다. 더구나 일본의 물가 상승률이 BOJ 목표치인 2%를 훨씬 상회하고 있는데도 그렇다. 4월 일본 소비자물가(CPI) 상승률은 3.4%를 기록했다. 특히 신선식품과 에너지를 제외한 근원 CPI 상승률은 4.1%로 42년 만에 최고였다.

셋째, 엔저(円低)다. 달러당 엔화 환율은 지난 26일 140.66엔으로 130엔대를 뚫고 올라왔다(엔화 약세). 엔화 가치는 지난해 10월의 150엔대엔 못 미치지만, 여전히 기록적인 약세를 보인다. 엔저는 도요타 자동차 등 일본 수출 대기업의 실적 개선을 자극하고, 이는 증시의 호재로 작용한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작년 자사주 매입 사상 최고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일본 증시에서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주주환원정책이 뜨겁게 펼쳐지고 있다. 배당과 자사주 매입 증가가 대표적이다. CNN에 따르면 일본 상장사들의 2022회계연도 자사주 매입은 약 9조7000억엔(약 92조원)에 달했다. 역사상 최고치다. 또 상장기업들이 배당을 늘리면서 닛케이 배당지수 역시 같은 기간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이런 기류엔 도쿄 증권거래소(TSE)가 중대한 역할을 했다. 일종의 관치다. TSE는 주가순자산비율(PBR)이 1배를 밑도는 기업들에 적극적인 주가 부양을 독려했다. 지난 2월 기준 PBR이 1배 이하인 도쿄 증권거래소 상장사가 약 절반에 달했다. PBR 1 이하는 시가 총액이 기업을 청산한 가치보다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기업 저평가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버블 붕괴 이후 오랫동안 저평가돼온 일본 주식 제값 찾기에 거래소가 본격 개입한 것이다. 주주 행동주의 확산도 빼놓을 수 없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자사주 매입, 배당 확대 등 주주가치 제고를 목적으로 하는 행동주의 펀드 수가 2014년 10개 미만에서 올해 약 70개로 늘어났고, 기업 이익을 주주에게 더 많이 돌려줘야 한다는 움직임을 이끌어냈다.

도쿄 증시 33년 만에 최고치
연일 외국인 자금 대거 유입

경기회복·금융완화·엔저 효과
친주주 정책에 '버핏 효과'까지

중국성장 누릴 대체투자처 각광
고령화·국가부채는 해결 과제

종합하면 일본 증시가 해외 투자자에게 다시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으로 압축할 수 있다. 여기에 때마침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이 가세했다. 좀처럼 미국을 떠나지 않는 버핏이 지난 4월 중순 일본을 방문했다. 그는 일본경제신문(닛케이)과의 인터뷰에서 “일본 5대 종합상사의 지분을 7.4%까지 늘렸다”고 발표했다. 5대 종합상사는 이토추ㆍ미쓰비시ㆍ마루베니ㆍ미쓰이ㆍ스미토모다. 지난 2020년 8월 공시를 통해 지분 보유 사실을 밝혔던 5대 상사에 대한 투자 비중을 더 높이겠다고 공개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일본은 미국을 제외하면 버핏의 최대 투자처가 된다.

지정학적 불확실성 속 강점 부각
여기까지는 일반론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만으론 뭔가 허전한 측면이 있다. 금융완화와 엔저는 새로울 것 없는 일본 경제의 오랜 특징이었다. 3분기 만의 플러스 성장이나 자사주매입 증가 역시 33년만의 활황을 설명하긴 조금 부족하다. 세계적 투자자인 버핏이 일본 증시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는 데 기여하긴 했지만, 밀려드는 외국인 투자 유입을 ‘버핏 효과’로만 볼 수는 없다.

그런데, 갑자기 예전과 확실하게 달라진 것이 한가지 있다. 일본의 ‘지정학적 매력’의 부상이다. 일본 경제와 증시가 미ㆍ중 패권 경쟁에 따른 지정학적 불확실성과 공급망 갈등의 수혜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를 비롯한 외신들은 중국에 직접 투자하는 것에 대한 리스크는 떠안지 않으면서도 중국 성장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안전 투자처로 일본이 꼽히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포트폴리오에서 아시아를 외면할 수 없는 글로벌 투자자에게 일본은 중국 투자를 대신할 최적의 대체 투자지라는 것이다.
 이런 시각은 중국과 일본의 밀접한 교역관계에서 비롯된다. 중국은 일본 수출과 수입의 약 20%를 차지하는 최대 교역국이다(2022년 수출의 19%, 수입의 21%). 많은 일본 기업이 수출입 거래를 통해 중국 경제 성과에 노출돼있다. 중국인의 일본 관광이 늘면 내수기업도 이익을 거둘 수 있다.

이런 관점은 버핏이 최근 일본 종합상사 지분을 늘린 것에도 적용된다. 닛케이에 따르면 이들 종합상사의 천연자원 거래는 중국 수요에 크게 의존하고 있고, 중국에 상당한 규모의 직접 투자를 하고 있다. 중국 경제가 성장하면 일본 종합상사의 사업 역시 성장하는 구조다. 중국에 직접 투자하지 않고도 중국 경제 성장의 혜택을 누리기에 딱 맞는 투자 대상일 수 있다. 흥미로운 대목은 버크셔 헤서웨이가 일본 종합상사 지분을 늘린 반면 지난해 샀던 대만 반도체회사 TSMC 주식 41억 달러어치는 모두 처분했다는 사실이다. 버핏은 지난 6일 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열린 연례주주총회에서 TSMC를 “세계에서 가장 잘 관리되고 중요한 회사 중 하나”로 추켜세우면서도 TSMC 지분 매각 사유와 관련해 “TSMC의 위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것을 재평가했다”고 말했다. 그는 “대만보다 일본에 배치한 투자에 더 기분이 좋다”고도 했다. 이는 TSMC는 매도하고, 일본 상사 주식은 매입한 결정이 지정학적 리스크와 무관치 않음을 시사한다.

세계 반도체 초일류기업 일본 집결
글로벌 투자자에겐 일본 반도체 산업의 재부상 역시 눈길을 끄는 장면이다. 일본은 최근 몇 년 사이 TSMC(파운드리 공장), 마이크론(D램 생산라인), 삼성전자(패키징 시제품 라인) 등 반도체 업계 최고 기업을 모두 유치했다. 닛케이에 따르면 2021년 일본 정부가 반도체 산업 육성에 나선 이후 관련 기업의 일본 투자액이 2조엔(약 19조원)을 넘어섰다. 투자 규모가 엄청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일본이 중국이나 대만 해협과 떨어진 곳에 있는 첨단산업 생산기지로 부각되는 상징성을 연출한다. 이는 지정학적 리스크를 줄이려는 글로벌 투자자에게 일본 선호도를 높이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 증시 랠리가 얼마나 더 지속할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시장엔 회의론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 경기회복의 한계다. 수출입 비중이 큰 일본 경제는 여전히 글로벌 경기 의존도가 높다. 그런데 세계 경제의 양대 축인 미국과 중국 경기는 하반기에 낙관하기 힘들다. 초금융완화와 엔저도 변수가 많다. 우에다 BOJ 총재가 금융 정상화의 칼을 빼지는 않았지만, 그 시점을 고심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주요국이 금리 인상을 멈추면 엔저는 급제동이 걸릴 수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고령화와 천문학적 국가부채 등 해묵은 과제도 산적해 있다. 그럼에도 일본이 미ㆍ중 패권 다툼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 흐름에서 지정학적 특수라는 뜻밖의 호재를 만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 기회를 붙잡아 일본 증시가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을지는 일본 경제의 진짜 실력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