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한나 아렌트가 1963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펴낸 뒤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존재는 ‘악의 평범성’이란 말로 오랜 세월 규정돼 왔다. 이후 자료 접근성이 넓어지면서 독일 철학자 베티나 스탕네트는 더 치밀한 연구를 해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을 펴냈다. 이 책에서는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명령에 복종’한 ‘평범한 악’의 대명사인 아이히만은 없고, 자기 이미지를 가꾸기 위해 엄청나게 탐독하고, 산더미 같은 글을 쓰는 데 몰두하며, 꼭 상관의 명령이 아니더라도 유대인 살해를 기획했던 그의 새로운 모습이 드러난다. 이 책의 원서는 2011년에 나왔고 한국어판은 올해 출간 예정인데, 지난 10여년간 국내에서 아이히만의 고정된 이미지가 계속 재생산된 것은 한편으로 안타까움을 불러일으켰다. 번역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고, 편집도 미뤄진 탓이다.
번역자·편집자가 부족한 현실
뒤늦게 나온 ‘국내 초역’ 역설
지식의 수원지에 대한 목마름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출판하면서 어려운 점은 독자가 줄어드는 것뿐 아니라 양질의 저자, 번역자, 편집자 모두 부족하다는 것이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전 2권)은 우리 역사를 다룬 것임에도 원서 출간 30~40년 만인 올해야 완간됐다. 1권 영어판 출간 시기는 1981년, 2권은 1990년이지만 국내에서는 1권만 번역·유통돼 왔다. 전에 한 출판사가 완간을 시도하긴 했다. 하지만 번역이 마무리되지 못했고, 다른 번역자에게 넘어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나오게 됐다.
이슈를 첨예하게 논의해야 할 제때에 책이 나오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뭘까. 적합한 번역자를 찾기 힘들고, 때때로 마감 약속이 지켜지지 않기 때문이다. 대학의 전공자들이 팀을 꾸려보지만, 쪼개면 더 쉬울 것 같은 이 방법은 대개 함정이다. 개인별 실력 차가 커서 결국 한 명이 전체를 다시 고쳐야 한다. 혹은 모두가 방관할 경우 들쭉날쭉한 번역 탓에 출간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1988년 발간돼 전공자들에게는 필독서로 꼽히는 앤서니 리드의 『대항해시대의 동남아시아 1450~1680』는 분량도 방대하지만 미얀마어·캄보디아어·라오스어 등이 혼재돼 표기 원칙조차 정하기 어렵다. 어쨌든 이 책은 전공자가 번역을 시도하다가 중도 하차한 뒤 수년이 흘러 전문 번역가에게 넘겨진 뒤에야 마무리됐다.
출판 편집자 중에는 외국어 실력이 뛰어난 이들이 있다. 그중 일부는 오역을 바로잡는 데 전문이다. 이들은 책 한 권을 편집하는 데 6개월에서 1년까지도 들인다. 출판사 입장에선 수지가 맞지 않지만, 그나마도 이런 실력자는 많지 않다.
나는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1, 2권을 2012년 출간됐을 때 읽고 3권이 나오길 기다리다가 8년 뒤에 나온 그것을 결국 읽지 못했다. 몇 년이 흐르면서 완독할 의지는 수그러들었고, 앞의 두 권을 복기하는 일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규모 출판사에서 대표가 직접 번역한 듯해 격려하고픈 마음이 크지만, 1930년대에 나온 무질의 대표작을 2022년에야 본다는 것은 너무 늦은 감도 있다.
해외에서 한동안 읽히다가 절판된 책을 우리는 지금 초역으로 펴내는 경우도 있다. 존 루카스의 『부다페스트 1900년』은 1988년 영어판이 나온 뒤 헝가리어·프랑스어 등으로 번역됐다가 영어판은 시장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한국어판은 올해 첫선을 보였다. 뒤늦게나마 내는 이유는 저자가 달리 비할 데 없는 문명의 초상화를 그려냈고, 100년도 더 지난 그 시절 부다페스트의 역사에 현대적인 요소가 여전히 있기 때문이다.
출판사들은 가끔 띠지에 ‘국내 초역’이라는 문구를 넣는다. ‘초역’은 매혹적인 카피로 마치 다락방에서 보물을 찾은 것도 같고, 번역자의 결기가 대단해 보이며, 앞 시대 독자들은 못 누린 것을 우린 볼 수 있다는 기쁨을 주지만, 달리 말해 이건 오래된 작가가 몇십 년이 지나서야 겨우 출간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거기엔 어떻게도 보상받을 수 없는 빛바랜 시간의 간극이 있다. 그때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뒤늦게 아는 것은 독자에게 시야와 사고의 제한을 이미 안겼을 뿐 아니라 원본보다 그 뒤를 쫓아 만들어낸 2차 생산물을 오리지널처럼 여겨온 세월이기도 하다. 게다가 어떤 것들은 이미 구시대의 유물이 돼 지금 열광하기엔 민망한 감도 있다.
내가 애정하는 작가 클라우디오 마그리스의 『다뉴브』는 한국어판이 2015년에 나왔지만 원서는 1986년 출간됐다. 30년이 지나서라도 볼 수 있어 다행이었지만, 이 책이 10년만 서둘렀어도 판매는 훨씬 높았을 듯해 아쉬웠다. 2000년대 초반엔 가령 『지식의 최전선』 같은 책이 큰 호응을 일으킬 만큼 지적 호기심이 팽배했고 지성사에 목말라하는 독자가 꽤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럽의 여러 나라를 장대하게 흐르는 다뉴브강의 지적 수원을 맛보려는 독자는 2015년에 이미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