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빨리 고향(북한)에 돌아가고 싶습네다.”
중국 단둥에 외화벌이하러 나온 북한 노동자를 만난 중국 교포가 전한 말이다. 현재 단둥에 나온 북한 노동자들은 보통 3년 이상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최근 북‧중 국경이 곧 개방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들떠 있다고 한다.
북한 노동자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3년 가까이 가족들을 만나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 중국 교포는 “어떤 북한 노동자는 임신 7개월 된 아내를 북한에 두고 왔는데 아들이 벌써 3살이 됐다. 전화로 태어난 아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찢어진다고 한다”고 말했다.
북‧중 국경개방 소식은 지난해 말부터 있었지만, 그동안 소문에 그쳤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지난 5일 코로나 종식 선언을 하면서 북한 노동자들은 이번만은 사실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중국 교포는 “북한 노동자들이 마음은 벌써 고향에 가 있고 귀국을 준비하면서 가족과 친지들에게 줄 선물을 구입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비단 단둥만 그런 것이 아니다. 중국 베이징에 유학하러 나온 북한 대학원생도 마찬가지다. 3년 전 베이징에 있는 대학에 단기 유학(1년 정도)을 왔다가 졸지에 오도 가도 못하게 됐다. 이들은 현재 주중 북한 대사관 안에 있는 호텔에서 숙식하고 있다. 이 호텔은 2018년 베이징에 출장 나오는 북한 인사들을 위해 지어졌다. 그런데 지금은 북한 대학원생들을 위한 기숙사로 사용되고 있다. 다행히도 3년 가까이 베이징으로 출장 나온 북한 사람도 없었다.
중국 교포는 “젊은 학생들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단기 코스를 마치고 귀국하지 못하고 3년 가까이 호텔에 갇혀 있다”고 말했다. 주중 북한대사관도 이들을 돌보느라 비용이 만만치 않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 학생들이나 대사관 직원들이나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북‧중 관계에서 3년 가까이 국경이 폐쇄된 경우는 1960년 후반 문화대혁명 때도 있었다. 문화대혁명이 시작한 1966년부터 1969년까지 북‧중 관계는 거의 ‘원수’에 가까웠다. 문화대혁명의 주역인 홍위병은 김일성을 ‘수정주의자’로 공격했다. 이에 북한은 “수정주의 문제는 오직 미제의 월남(베트남) 전략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가 기준인데 무슨 소리냐”며 맞섰다. 또한 북한은 “중국이 오히려 편협한 교조주의적 행태를 보인다”고 공격했다.
이렇게 양측이 싸우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 흐루쇼프 실각 이후 새로 등장한 브레즈네프 정권에 대해 북‧중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북한은 브레즈네프의 정책을 흐루쇼프의 정책과는 구별해 보고 있었고, 중국은 ‘흐루쇼프 없는 흐루쇼프주의’로 간주했다.
이에 따라 북‧소 관계는 스탈린 시대를 방불케 할 만큼 최상의 단계로 격상했다. 그 사례로 1966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김일성-브레즈네프 정상회담을 들 수 있다.. 북‧소 정상회담에서 극동지역에 북한 벌목 노동자를 2만여 명을 파견하기로 합의했다. 이런 관계를 지켜본 홍위병이 김일성을 수정주의자로 몰아간 것이다. 당시 수정주의는 ‘적’과 다름없다는 뜻이었다. 북‧중은 서로 현지 대사를 소환할 정도로 관계가 악화했다.
특히 옌볜자치주 주장이었던 주덕해는 홍위병으로부터 박해를 받아 주장에서 쫓겨나 말년을 비참하게 보냈다. 홍위병은 그가 북‧중 국경 획정 과정(1958~1964)에서 백두산 천지 면적을 북한에 4.5% 더 떼어주는 (북한 면적이 54.5%) 등 북한에 유리하도록 했다고 몰아세웠다. 그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주덕해가 마오쩌둥을 비하하고 김일성을 떠받들었다 등의 허위 사실을 만들기도 했다.
이런 불편한 관계를 푼 건 해결사 저우언라이였다. 그는 1967년 10월 아프리카 모리타니 공화국의 다다흐 대통령이 베이징을 거쳐 방북하는 기회를 이용했다. 저우언라이는 다다흐 대통령에게 김일성에 대한 화해의 ‘선물’로 3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북한 거주 화교들의 반북적 행동에 유감을 표한다. 둘째, 북한 주재 중국 대사관의 활동에 약간의 편향성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셋째, 북한의 반제국주의 투쟁을 지지한다. 당시 북한에는 1만여 명의 화교들이 살고 있었다. 문제의 발단이 된 것은 1966년 평양에 있는 중국인 중학교 학생들이 홍위병을 자칭하며 마오쩌둥 사상을 교육 과정에 포함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학교 관리자의 사무실에 들어가 집기를 부수는 사건이 발생했다.
북한 당국은 이에 학교를 폐교 조치하고 화교들에게 중국 국적을 버리고 북한인으로 살거나 아니면 북한을 떠나라고 했다. 대부분 화교는 북한을 떠났고 일부는 북한에 정착했다. 그 이후 북‧중 관계가 회복되면서 다시 북한으로 돌아오는 화교가 생겼다. 현재 2000여 명이 사는 것으로 알려졌고 북한 화교를 대표하는 조직은 ‘조선화교연합회’다. 최근 평양에 부임한 왕야쥔 주북한 중국대사는 이들을 만나 애환을 들었다.
김일성은 홍위병의 비난을 참을 수 없었지만, 중국과의 관계가 더 악화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는 베이징으로 돌아가는 다다흐 대통령에게 저우언라이에 보낼 4가지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것은 ①북한의 대중국 정책은 변함이 없으며,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②마오쩌둥‧저우언라이 동지와 깊은 우의를 나눈 바 있으며, 공동 투쟁 속에서 쌓아온 이 우의를 매우 귀중히 여긴다 ③쌍방 간에는 약간의 의견 차이가 존재하나 이는 엄중한 것이 아니며, 서로 얼굴을 맞대고 토론하면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다. ④만약 북한이 침략을 당하면, 중국이 과거 여러 차례 그러했던 것처럼 북한을 도우리라는 것을 믿는다 등이다.
1967년에 주고받은 김일성-저우언라이 구두 메시지는 2년 뒤 1969년 10월에 가서야 효력이 발휘했다. 최용건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방중하면서 북‧중 관계가 개선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 후반과 2020년대 초반에 닫혔던 북‧중 국경이 열리는데 모두 3년 가까이 걸렸다. 1960년대는 정치적 이유였고 2020년대는 방역적 이유였다. 1960년대는 해결사는 저우언라이였고, 2020년대는 세계보건기구였다.
북한은 올해 9월에 열리는 항저우 아시안게임에 참가할 것으로 보인다. 바야흐로 북‧중 밀월 시대가 재개될 조짐이다. 게다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중국에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를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중국은 오매불망 바라던 차항출해(借港出海, 타국의 항구를 빌려 바다로 나간다)를 하게 돼 날개를 달게 된다. 여기에 북한마저 합류하면 북‧중‧러가 극동 지역에서 뭉치는 셈이다.
한‧미‧일 vs 북‧중‧러.
북‧중 국경개방이 아이러니하게 신냉전으로 가는 첫걸음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선다.
고수석 국민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