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박정희 ‘하면 된다’ 근대화 업적, 역사적 평가 받아야”-김대중 육성 회고록〈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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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육성 회고록 〈3〉

서울 상암동 하늘공원 북쪽 자락에는 ‘박정희대통령기념관’이 있다. 연면적 5200㎡(약 1600평)에 3층 규모로 꽤 큼지막하고 번듯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하 존칭 생략)의 일생과 고속도로 건설 등 근대화, 새마을운동 같은 업적을 기리는 유품과 사진이 전시돼 있다.

이 기념관에는 박정희와 김대중, 섞이기 힘든 두 사람의 정신이 함께 깃들어 있다. 산업화의 박정희와 민주화의 김대중이 공존하는 언뜻 부조리한 공간이다.

“박정희기념관 건립은 당시 국민 정서를 고려할 때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핍박당한 당사자이기에 추진할 수 있는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생전에 구술한 박정희기념관의 탄생 배경이다. 1997년 대통령 선거 유세 때였다. DJ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근대화를 이룩해 국가에 공헌했다”며 건립을 공약했다.

DJ, 박정희기념관 건립 추진 명예회장

1971년 7대 대선에서 맞붙은 박정희 민주공화당 후보(왼쪽)와 김대중 신민당 후보의 공식 포스터. [사진 중앙선 관 위 ]

1971년 7대 대선에서 맞붙은 박정희 민주공화당 후보(왼쪽)와 김대중 신민당 후보의 공식 포스터. [사진 중앙선 관 위 ]

대통령이 된 DJ는 99년 5월 대구를 방문해 재확인했다. “박 전 대통령이 이제는 역사 속에서 존경받는 지도자가 돼야 한다. 역사와의 화해가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며 박정희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 명예회장을 떠맡았다. 국가보조금 208억원을 책정하고, 2002년 1월 착공하도록 손수 나섰다.

DJ가 퇴임하고 건립 사업이 지지부진하던 2004년 8월 12일의 일이다. 박정희가 타계한 지 25년이 된 해였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서울 동교동으로 DJ를 예방했다.

(박근혜) “아버지 시절에 큰 피해를 보고 고생하신 것에 대해 딸로서 사과 말씀드립니다.”

(김대중) “고맙습니다. 사람이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상대방한테 얘기하면 풀어질 것도, 잘못했다는 말을 안 하면 그것이 오히려 더 서운할 때가 많지요.”

“박근혜 사과에 내가 구원받은 듯”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왼쪽)가 2004년 8월 서울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오른쪽)을 만나 “아버지(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많은 피해를 보고 고생한 것에 대해 딸로서 사과합니다”라고 말했다. [사진 국회사진기자단]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왼쪽)가 2004년 8월 서울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오른쪽)을 만나 “아버지(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많은 피해를 보고 고생한 것에 대해 딸로서 사과합니다”라고 말했다. [사진 국회사진기자단]

DJ는 감격했다. “25년 만에 박정희가 환생해 내게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나를 죽이려고 했던 그런 분(박정희)의 따님에게서 아버지 사후에 대신해 사과를 받다니 내가 구원을 받은 것 같았다. ‘영원한 원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근혜) “아버지 기념관을 위해 내려준 어려운 결정에도 감사드립니다.”

(김대중) “(내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최대 정적으로 지내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이 국민에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부여한 것에 대해선 역사적 평가를 받을 만합니다.”

DJ가 없었다면 박정희기념관은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참여연대·민주노총 등이 ‘박정희 기념관 반대 국민연대’라는 단체를 결성, “기념관 건립은 반통일적 냉전 수구세력들의 기득권 수호에 발판이 될 것”이라며 극렬하게 반발했다. 역풍을 뚫고 밀어붙인 게 DJ였다.

박정희의 공과(功過)를 따져보자는 취지가 DJ의 결단 속에는 담겼다. 박정희에 대해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에 있어 ‘우리도 하면 된다’는 인식을 국민에게 심어준 공로가 크다”고 긍정했다. 하지만 “독재 정권이어야만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견해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또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정부를 뒤엎고, 인권과 생명을 유린하는 과오를 범했다”고 비판했다.

박정희기념관 건립은 노무현 정부에서 국고보조금 지원에 제동을 거는 등 표류했다. 첫 삽을 뜬지 12년이 지나서 2012년 이명박 정부 시절 문을 열었다.

기념관 건립으로 보복 대신 화해 손길

2012년 2월 서울 상암동 하늘공원 북쪽 자락에 개관한 ‘박정희대통령기념관’의 모습(오른쪽 사진). [중앙포토]

2012년 2월 서울 상암동 하늘공원 북쪽 자락에 개관한 ‘박정희대통령기념관’의 모습(오른쪽 사진). [중앙포토]

박정희에게 화해의 손을 내민 이유에 대해 DJ는 판소리의 한(恨)을 끌어들여 설명했다.

“춘향이의 한은 이 도령을 만나 백년해로하는 것이었다. 춘향이는 이 도령이 어사로 출두해 다시 만남으로써 만족했다. 누구를 징계하고 보복하는 건 나오지 않는다. 흥부의 한은 가족과 배부르게 먹는 것이었다. 박 속에서 재물 보화가 나와 부자가 됐다. 자신을 그렇게 박대했던 형님을 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재물을 나눠줬다. 심청이의 한은 아버지가 눈을 뜨는 것으로 해결됐다. 공양미 300석을 받고 인당수에 몸을 던지고 죽었다. 이후 옥황상제가 건져 올려 황후가 됐는데 아버지가 눈 뜬 것을 보지 못해 심청이의 한이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맹인잔치를 해서 심봉사가 눈을 뜨고 비로소 한이 풀렸다.”

DJ는 박정희에게 맺힌 한을 보복 대신에 박정희기념관이라는 화해의 상징물을 만듦으로써 풀었다. DJ는 “보복이나 부귀영화는 한을 푸는 본질이 아니다. 자기의 고통스러운 현실이 해결되는 것이 한을 푸는 목적”이라고 했다.

DJ·박정희 질긴 악연…생전 딱 한 번 대면

김대중과 박정희의 악연은 질겼다.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가 비극적 최후를 맞은 79년 10·26까지 18년 동안 이어졌다. 4전 5기 끝에 국회의원에 첫 당선된 DJ는 5·16으로 국회가 해산되는 바람에 의사당에 발을 디뎌보지도 못했고, 이후 야당 정치인으로서 탄압을 받았다. 본격적인 충돌은 71년 대선이었다. 야당 대선 후보로 나선 DJ는 “박정희씨를 뽑으면 영구 집권의 총통 시대가 온다”며 거세게 공격했다. 비록 95만 표 차로 졌지만, DJ는 박정희의 정적으로 부상했다. 유신 반대 투쟁, 도쿄 피랍, 가택 연금, 재야 활동, 투옥에 이르기까지 박정희 정권 내내 DJ의 길은 혹독한 가시밭이었다. 그런 역경 속에 DJ의 존재감을 키워준 장본인은 역설적으로 박정희였다.

두 사람이 생전에 딱 한 번 대면한 사실은 아이러니다. DJ가 목포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직후인 68년 청와대 신년 하례식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일곱 살 많은 박정희(1917년생)와 마주하고 선 채로 5분 정도 얘기를 나눴다. DJ가 본 박정희의 인상평이다.

“나를 그렇게 못 잡아먹어 해서 어떤 모양을 하고 있나 갔다. 박 대통령이 굉장히 엄격하고 냉철한 인상이 아니었다. 그렇게 친절하고 다정할 수가 없었다.”

차지철 통해 요청한 박정희 면담 불발

박정희가 서거하기 서너 달 전쯤이었다. DJ는 정권의 2인자로 불리던 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에게 측근을 보내 “박 대통령과의 면담을 주선해 달라”고 요청했다. DJ는 당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에서 윤보선·함석헌과 함께 공동의장이었다.

“우리가 71년 대선에서 붙었고 (유신 체제에 대한 야당과 국민 불만이 고조되는 불안한 시기에) 서로 말 한마디 안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아무 조건 없이 만나 서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자. 마음이 일치해 합의 보면 좋고, 그렇지 않더라도 상대방이 왜 나를 반대하고 싫어하는지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이런 뜻을 전하며 만나자고 연락했다.”

면담은 거절당했다. 차지철이 박정희에게 DJ 뜻을 전달했는지는 알 수 없다.

“불행한 운명 얘기해주려 했다”

DJ는 10·26 사태 이튿날 새벽 박정희의 서거 소식을 접하고 “이건 아닌데”라는 걱정이 앞섰다. “혼잣말로 ‘이런 식(암살)으로 박정희 정권이 끝나면 안 되는데…. 4·19처럼 국민 힘으로 끝내야 하는데’ 했다. 국민이 안 일어나는 민주주의는 사상누각이다. 국민이 봉기했으면 전두환(당시 보안사령관)이 어디서 나오겠는가. 김재규(당시 중앙정보부장)가 죽였기 때문에 전두환이 나올 수 있던 거다.”

DJ는 김재규를 의인으로 보는 시각에 반대한다. 4·19처럼 시민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할 기회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나는 박 대통령이 불행하게 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당신의 불행한 운명이 보이니까 제발 좀 여기서 스톱(stop)하라고 그 말을 하기 위해 만나려고 했다. 생전에 허심탄회하게 얘기 못 해 본 게 지금도 한스럽다.”

“절대적 천사도, 절대적 악마도 없다”

박정희와 역사적 화해를 시도한 바탕에는 ‘절대적 천사도, 절대적 악마도 없다’는 DJ식 관용론이 깔려 있다.

“사람 마음속에 선과 악이 있다. 악인이 선인이 된 예도, 선인이 악인이 된 예도 얼마든지 있다. 누구나 악을 행할 수 있다. 노력에 따라 선인도, 악인도 된다. 그 때문에 사람에게 관대해야 한다.”

DJ의 한에 대한 해석과 관용론은 증오와 대결로 치닫는 요즘 세태에 울림이 있다.

4회 〈‘국회의원 DJ’의 4전 5기〉가 이어집니다.

중앙일보-연세대김대중도서관 공동기획

중앙일보-연세대김대중도서관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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