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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경호의 시시각각

간호법 파동이 남긴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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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지난 1년 넘게 논란에 휩싸였던 간호법 제정안이 오늘 국회 본회의에 다시 상정된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미 거부권을 행사한 만큼 사실상 폐기 수순을 밟을 것이다. 그동안 간호법을 둘러싼 주장 중에 가장 눈길이 갔던 건 한겨레에 게재된 강원도 왕진의사 양창모씨 칼럼이었다. 그가 전하는 왕진 현장의 안타까운 사연 속에 의료 사각지대에 놓인 이가 너무 많았다. 간호법 논의에서 정작 가장 중요한 환자 집단이 빠져 있다는 주장에 공감했다. 그는 “간호법 논쟁의 본질은 간호협회와 의사협회 두 이익집단의 싸움이 아니다. ‘제발 병원에서 나와 집으로 와 달라’는 집에서 나오기 힘든 100만 명 환자와 ‘어떤 일이 있어도 병원에서 나갈 수 없다’는 의협 간 밥그릇 싸움”이라고 적었다.

늘어나는 가정·방문 간호 수요 외면
낡은 의료법 문제점 여실히 드러내
의사협회 기득권 카르텔 이젠 깨야

방문진료를 하는 동네의원은 0.4%뿐이다. 의사가 못 가면 간호사라도 가야 한다. 간호사가 환자를 찾아가는 의료서비스를 하기 위해선 의사의 가정간호 의뢰서(병원)나 방문간호 지시서(장기요양기관)가 필요하다. 하지만 의사들은 의료사고 가능성 등을 이유로 이런 서류 발급에 인색하다. 보건소나 주민센터 소속 간호사가 환자 가정을 방문해도 법적 근거가 없어 상처 소독 같은 간단한 처치조차 못 한다. 간호법을 다시 만들든, 의료법을 고치든 환자 입장에서 대책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간호법 거부권 행사에 반발해 대한간호협회가 ‘준법 투쟁’에 돌입했다. ‘불법 진료행위’ 신고가 닷새 만에 1만2000건을 넘어섰다. 의료법에 없는 진료보조(PA) 간호사의 모호한 법적 지위가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의료 현장에서 부족한 의사를 메워 주는 PA 간호사가 1만 명이 넘는다. ‘준법 투쟁’이라는 형용모순 자체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는 낡은 현행법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간호법 파동은 의료 현장에서 바꿔야 할 게 얼마나 많은지 여실히 보여줬다. 고령화 추세에 대비해 가정·방문 간호를 확대해야 하고, 코로나19 덕분에 국민이 장점을 충분히 확인한 비대면 진료를 법제화해야 하며, 의대 정원을 늘려 중장기 의사 부족에 대비해야 한다.

가정·방문 간호나 비대면 진료에 대한 의사의 우려에 수긍할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과도하게 대접할 필요도 없다. 의사들이 걱정하는 의료사고 가능성을 줄이면서 국민이 원하는 서비스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필요하면 비대면 진료 등에 의사의 면책 범위를 높이는 방안도 생각할 수 있다.

의대 정원 늘린다고 소아 응급환자 치료 같은 필수의료 붕괴 현상이 곧바로 치유되는 건 아니다. 의사 절대 수가 부족한 게 아니라 일부 인기과의 편중 현상, 즉 의사의 분포가 문제라고 의사협회는 주장한다. 분포도 문제지만 절대 수도 모자란다. 의대 정원 확대는 단기 대책은 못 될지언정, 꼭 필요한 중장기 대책이다. 과도한 의대 쏠림현상은 의사들의 기대수익이 높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인센티브 시스템이 잘못 설계된 탓이 크다. 앞으로 의사가 충분히 공급될 것이라는 신호라도 줘야 지금 같은 쏠림이 잦아든다.

물론 단기 대책도 필요하다. 당장의 필수의료 붕괴를 막기 위해선 심장병 같은 중증환자를 보는 병원을 지역별로 지정하고, 이들 병원의 의료인력 고용을 의무화하는 대신 건보 수가를 올려주는 방안을 검토할 만하다.

의사는 현재 보건의료체계의 맏형이지만 그에 맞는 책임감을 보여주지 못했다. 국민 건강을 아무리 앞세워도 국민과 환자의 눈으로 보면 그저 직역 이기주의에 충실한 이익단체일 뿐이다. “기득권 카르텔의 부당한 지대 추구가 방치된다면 어떻게 혁신을 기대하고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윤 대통령이 지난 2월 연세대 졸업식에서 한 말이다. 군림하는 거대 노조에 대한 비판으로 당시는 받아들여졌다. 지대 추구라는 점에선 의사도 다르지 않다. 의사가 ‘맏형’ 노릇을 제대로 못 하면 대통령의 어퍼컷이 겨냥하는 기득권 카르텔의 다음 타깃이 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