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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도안 최장 30년 집권 가능…포퓰리즘이 대지진 눌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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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28일(현지시간)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대선 결선투표에서 승리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그려진 대형 천을 펼치고 기뻐하는 지지자들. ‘21세기 술탄(오스만 제국의 왕)’이라 불리는 그는 2003년부터 내각제 총리와 대통령직을 번갈아 가며 철권통치를 하고 있다. [타스=연합뉴스]

28일(현지시간)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대선 결선투표에서 승리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그려진 대형 천을 펼치고 기뻐하는 지지자들. ‘21세기 술탄(오스만 제국의 왕)’이라 불리는 그는 2003년부터 내각제 총리와 대통령직을 번갈아 가며 철권통치를 하고 있다. [타스=연합뉴스]

유례 없는 고물가, 5만명 가까운 사망자를 낸 대지진에도 튀르키예 민심은 20년 베테랑 지도자가 부르짖는 ‘오스만의 꿈’을 택했다. 28일(현지시간) 치러진 대선 결선투표에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69) 대통령이 승리하면서 5년 임기를 연장해 최장 30년 집권의 꿈을 이어가게 됐다. ‘21세기 술탄(오스만 제국의 왕)’이라 불리는 그는 2003년부터 내각제 총리와 대통령직을 번갈아 가며 철권통치를 하고 있다. 2017년 통과한 대통령제 개헌안에 따라 에르도안이 의회에서 조기 선거를 소집하면 그는 2028년 대선에 한 차례 더 출마할 수 있고 여기서 승리하면 2033년까지 집권 가능하다.

2028년 대선에 한차례 더 출마 가능

이날 튀르키예 최고선거위원회는 에르도안이 52.2%의 득표율로, 6개 야당 연합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공화인민당(CHP) 대표(47.8%)를 누르고 승리했다고 밝혔다. 그는 승리 연설에서 “나의 당선으로 다시 한번 세계 균형은 재편될 것이다. 튀르키예는 세계 질서에서 특별한 권력과 힘을 갖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전했다. 그는 경제 정책과 관련해선 “자신감과 안정감을 갖고 계속 나아갈 것”이라며 저금리 기조를 재확인했다. 그의 승리 직후 리라화는 달러당 20.05로 사상 최저치에 머물렀다고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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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도안의 승리는 순탄치 않았다. 지난해 10월 튀르키예 소비자물가지수(CPI)는 85.51%를 찍어 24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고, 리라화 가치는 2021년 40%, 지난해 30% 폭락했다. 지난 2월 튀르키예 남부·시리아 북부를 강타한 대지진(규모 7.8)까지 맞물려 에르도안이 20년 만에 정권을 내줄 수 있다는 외신 분석이 쏟아졌다. 하지만 에르도안은 ‘현직 프리미엄’을 활용해 포퓰리즘성 정책을 쏟아냈다. 최저임금 인상과 연금 인상, 무료 연료·와이파이 제공, 외국산 농산물 관세 부과 등이 대표적이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여기에 튀르키예 유권자들의 민족주의 감성과 역사 인식에 호소하는 전략을 버무렸다. 오는 10월 튀르키예 건국 100주년인 점을 강조해 “새로운 튀르키예 100년을 건설하겠다”며 자강론을 부각했고, 선거 직전 오스만 제국의 역사적 장소인 이스탄불 아야 소피아(성소피아 성당)에서 이슬람식 예배를 하는 모습을 공개했다. 유권자들의 시선을 나라 안에서 외부로 돌려 ‘외세에 맞서는 민족의 영웅’으로 자신을 자리매김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에르도안이 속한 정의개발당(AKP)은 당원 1100만명에 달하는 조직으로, 시골 곳곳에 풀뿌리 조직을 갖고 있다”는 점도 승리 요인으로 꼽았다. 정부가 AKP에 가까운 그룹에 국책 사업을 몰아주는 것으로 유권자 관리를 해왔지만, 야당 CHP의 당원은 140만명으로 동원력이 상대적으로 열세였다는 것이다. 지진 피해 지역에서도 큰 민심 이반은 일어나지 않았다. 가지안테프 등 피해 지역 11곳 중 8곳이 에르도안을 지지했다.

에르도안의 당선 소식에 국제 사회는 희비가 엇갈렸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날 “친애하는 친구의 당선을 축하한다”며 “당신의 독립적인 외교 정책을 국민이 지지한 것”이라는 축전을 보냈다. 반면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트위터에 “나는 튀르키예가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동맹국으로서 양자 문제와 공동의 글로벌 도전 과제에 대해 함께 일하길 기대한다”는 글을 올렸다. 바이든은 2020년 미 대선 기간 에르도안을 향해 “독재자”라고 발언한 적이 있다.

에르도안의 연임으로 미국과 유럽, 나토의 ‘대러 단일 대오’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튀르키예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에도 대러 제재 동참에 거부하고 러시아산 석유·가스를 사들이며 모호한 중재 노선을 취하고 있다. 에르도안의 연임으로 스웨덴의 나토 가입도 낙관할 수 없게 됐다. 가디언은 “그가 러시아로 더 밀착할 것인가에 대한 첫 시험은 7월 나토 정상회의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소년 때 거리서 빵 팔며 생활비 보태

그의 당선으로 “튀르키예 민주주의가 크게 약화할 것”(타임지)이란 우려도 커지고 있다. FT는 “튀르키예는 높은 인플레이션과 급격히 줄고 있는 외화보유고 등으로 위기에 처했다”며 “경제 위기 해결이 급선무”라고 짚었다.

흑해 해안경비대원 아버지를 둔 에르도안은 소년 시절 거리에서 빵과 레모네이드를 팔며 생활비를 보태야 했다. 그는 10대 후반부터 이슬람주의 정당인 민족구원당에서 활동했다. 2001년 온건 이슬람주의를 표방하는 AKP를 창당해 총선에서 압승하며 2003년 총리로 취임했다. 그는 인프라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수백만 명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해 ‘경제 총리’로 승승장구했다. 에르도안은 2010년 국민투표로 헌법을 개정해 의원내각제를 대통령 중심제로 바꾸고 대통령 선거를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바꾼 뒤 2014년 대선에서 당선됐다. 이후 반대파를 숙청하고 언론을 장악하는 등 권위주의 행보가 시작됐다. 2016년 에르도안 정부에 불만을 품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이를 핑계 삼아 거침없이 반대파를 탄압한 일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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