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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그머니 오른 라면값, 그 뒤엔 ‘그리드플레이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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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치솟는 국제 물가를 구실 삼아 상품 가격을 지나치게 올려 이익을 부풀리는 기업 행태가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가격 인상 요인이었던 원자재값이 내리기 시작했는데 상품 가격에 반영하지 않으면서다. 이른바 ‘그리드플레이션(greed+inflation·기업 탐욕에 의한 물가 상승)’이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지난 25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 보도에 따르면 이날 미국 유명 패션 브랜드 랄프 로렌은 예상을 웃도는 1분기 실적을 내놓으면서 주가가 5% 이상 올랐다. 앞서 제품 평균 가격을 12% 인상한 결과다. 거대 생활용품 업체인 프록터앤드갬블(P&G)도 올 1분기 제품 가격을 10% 올렸다. 판매량은 전년 동기보다 3% 줄었지만 가격 인상 덕에 매출이 4% 증가했다.

WSJ은 “그리드플레이션은 현실이 됐다”며 “이 회사들의 1분기 실적은 기업이 가격 인상의 구실로 인플레이션을 사용해 왔다는 점을 시사한다”고 꼬집었다. 소비자에게 비용을 전가하는 방식으로 수익을 높였다는 의미다.

유럽에서도 그리드플레이션에 대한 비판이 잇따르고 있다. 영국 자유민주당 의원들은 경쟁시장청(CMA)에 폭리를 취하고 있는 유통기업을 조사할 것을 촉구했다. 독일의 대형 유통업체 에데카는 가격을 과도하게 올린 일부 공급업체의 상품 판매를 중단했다. 이탈리아에선 파스타면 가격이 급등하면서 불매 운동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푸리오 트루치 소비자권익보호협회 대표는 “높은 가격이 (기업의) 더 큰 이익을 위해 유지되고 있다. 소비가 크게 줄어야 가격이 내려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비판 속에서도 세계 각국 기업이 앞다퉈 제품값을 올리고 있는 건 소비자의 가격 저항이 낮아진 영향으로 풀이된다. 일반적으로 기업은 소비자가 구매를 포기하거나 경쟁사 상품을 선택할 가능성 등을 고려해 가격 인상을 망설인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여파로 변화가 생겼다. 인플레이션에 익숙해진 소비자들이 기업의 가격 인상을 ‘불가피한’ 결정으로 수용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기업이 가격을 올리면서 경쟁사 눈치를 볼 필요성 역시 줄었다. 원자재값 상승 등은 업계 전반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개별 기업이 가격 인상에 부담을 덜 느끼고, 가격 인상에 동조하기도 쉬워졌다는 얘기다.

그리드플레이션 논쟁은 지난해 미국 민주당 일각에서 ‘물가 난’의 주범으로 기업의 탐욕을 지목하면서 시작했고, 최근 다시 가열되고 있다. 크게 올랐던 원자재값이 하락세로 돌아섰는데도 주요 상품 가격은 그대로 거나 더 오르고 있어서다. 다만 그리드플레이션에 대한 반론도 나온다.

기업 이윤 증가가 인플레이션에 미친 영향은 임금 상승으로 상쇄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WSJ는 “기업들이 가격을 성공적으로 올린 것은 다른 경제 주체가 소비를 계속했기 때문”이라며 “그리드플레이션이 경기 침체를 막는 데 도움이 되는 측면도 있다”고 전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라면 업계 ‘빅3’인 농심·오뚜기·삼양식품은 지난해 라면 제품 출고가를 올렸고, 올 1분기 실적이 뛰었다. 최근 원자재값 하락을 가격에 반영하지 않은 채 매출을 늘렸다는 비판이 나왔다. 다만 수출 호조에 따른 호(好)실적이라는 반론이 함께 제기됐다.

그리드플레이션 논쟁에 대해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기업의 목표는 이윤 극대화라 한번 올린 가격을 내릴 동기가 크지 않다”며 “소비자 운동 활성화는 한 방법”이라고 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기업은 경영 혁신과 공급망 다변화 등으로 비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우선해야 하고, 가격 결정력이 지나치게 큰 독과점 시장은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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