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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에 국뽕 버무려 이겼지만…에르도안 웃자 리라 폭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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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28일(현지시간) 이스탄불에서 지지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UPI=연합뉴스

튀르키예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28일(현지시간) 이스탄불에서 지지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UPI=연합뉴스

유례 없는 고물가, 5만명 가까운 사망자를 낸 대지진에도 튀르키예(터키) 민심은 20년 베테랑 지도자가 부르짖는 ‘오스만의 꿈’을 택했다. 28일(현지시간) 치러진 대선 결선투표에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69) 대통령이 승리하면서 5년 임기를 연장해 최장 30년 집권 꿈을 이어가게 됐다. ‘21세기 술탄(오스만 제국의 왕)’이라 불리는 그는 2003년부터 내각제 총리와 대통령직을 번갈아 가며 철권 통치를 하고 있다.

이날 튀르키예 최고선거위원회는 개표 99% 상황에서 에르도안 대통령이 52.2%의 득표율로 6개 야당 연합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공화인민당(CHP) 대표(47.8%)를 누르고 승리했다고 밝혔다. 그의 당선이 유력해진 29일 자정을 전후해 이스탄불과 앙카라에 모인 에르도안 지지자 수만 명이 손뼉을 치고 환호하며 에르도안을 연호했다고 미국 뉴욕타임스(NYT)가 전했다. 이스탄불 자택에 머무르던 에르도안 대통령은 전용기로 앙카라로 이동, 지지자들을 맞이했다. 그는 연단에서 지지자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그는 승리 연설에서 “오늘 선거의 승자는 8500만 튀르키예 국민”이라고 선언하면서 “나의 당선으로 다시 한번 세계 균형은 재편될 것이다. 튀르키예는 세계 질서에서 특별한 권력과 힘을 갖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향후 경제 정책과 관련해선 “자신감과 안정감을 갖고 계속 나아갈 것”이라며 저금리 기조를 재확인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국제적 명성과 재무 관리, 투자 및 고용을 지향하며, 생산적인 경제를 설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승리 선언 직후 리라화는 달러당 20.05으로 사상 최저치에 머물렀다고 로이터통신이 28일 보도했다.

포퓰리즘 버무린 ‘국뽕’, 경제·지진 이겼다

28일(현지시간) 에르도안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그의 당선이 유력해지자 에르도안의 얼굴이 인쇄된 깃발을 들어보이고 있다. 타스=연합뉴스

28일(현지시간) 에르도안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그의 당선이 유력해지자 에르도안의 얼굴이 인쇄된 깃발을 들어보이고 있다. 타스=연합뉴스

지난 14일 1차 투표 땐 과반에 미달(49.5%)했던 득표율이 보여주듯 에르도안의 이번 승리는 순탄치 않았다. 지난해 10월 튀르키예 소비자물가지수(CPI)는 85.51%를 찍어 24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고, 리라화 가치는 2021년 40%, 작년엔 30% 폭락했다. 지난 2월 튀르키예 남부·시리아 북부를 강타한 대지진(규모 7.8)까지 맞물려 에르도안이 20년 만에 정권을 내줄 수 있다는 외신 분석이 쏟아졌다. 야권 후보 클르츠다로을루도 “에르도안이 되면 양팟값이 또 폭등한다”며 경제 실정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하지만 20년 집권 고수답게 에르도안 대통령은 대선을 앞두고 ‘현직 프리미엄’을 활용해 포퓰리즘성 정책을 융단폭격하듯 쏟아냈다. 최저임금 인상과 연금 인상, 무료 연료·와이파이 제공, 외국산 농산물 관세 부과 등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튀르키예 유권자들의 민족주의 감성과 역사 인식에 호소하는 ‘국뽕 전략’을 버무렸다. 오는 10월 튀르키예 건국 100주년인 점을 강조해 “새로운 튀르키예 100년을 건설하겠다”며 자강론을 부각했고, 선거 직전 오스만 제국의 역사적 장소인 이스탄불 아야 소피아(성소피아 성당)에서 이슬람식 예배를 하는 모습을 공개했다. 유권자들의 시선을 나라 안에서 외부로 돌려 ‘외세에 맞서는 민족의 영웅’으로 자신을 자리매김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에르도안이 속한 정의개발당(AKP)은 당원 1100만명에 달하는 조직으로, 시골 곳곳에 풀뿌리 조직을 갖고 있다”는 점도 승리 요인으로 꼽았다. 정부가 AKP에 가까운 그룹에 국책 사업을 몰아주는 것으로 유권자 관리를 해왔지만, 야당 CHP의 당원은 140만명으로 동원력이 상대적으로 열세였다는 것이다.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는 28일 “역사상 가장 불공평한 선거였음에도 권위주의 정부를 바꾸려는 국민의 의지가 분명히 드러났다”면서 “나는 계속해서 투쟁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지진 피해 지역에서도 전세를 뒤집을 정도의 민심 이반은 일어나지 않았다. 예니사팍에 따르면 가지안테프를 비롯해 피해 지역 11곳 가운데 8곳이 에르도안을 지지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희비 엇갈린 푸틴·바이든

튀르키예의 에르도안 대통령(왼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해 10월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튀르키예의 에르도안 대통령(왼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해 10월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에르도안의 당선 소식에 국제 사회의 희비는 엇갈렸다. 튀르키예 국영 아나돌루 통신에 따르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8일 개표 75% 상황에서 “친애하는 친구의 당선을 축하한다”며 “당신의 독립적인 외교 정책을 국민이 지지한 것”이라는 축전을 보냈다. 반면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트위터에 “에르도안 대통령의 당선을 축하한다. 나는 튀르키예가 나토 동맹국으로서 양자 문제와 공동의 글로벌 도전 과제에 대해 함께 일하길 기대한다”며 짤막하게 대응했다. 바이든은 2020년 대선 기간 에르도안을 향해 “독재자(autocrat)”라고 발언한 적이 있다.

에르도안의 연임으로 미국과 유럽,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대러 단일대오’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튀르키예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에도 대러 제재 동참에 거부하고 러시아산 석유·가스를 사들이며 모호한 중재 노선을 취했기 때문이다. “튀르키예가 러시아 경제에 숨통을 틔워주고 있다”는 볼멘소리가 EU 국가들 사이에서 나왔다.

특히 스웨덴의 나토 가입 문제가 다시 ‘깜깜이’ 상황이 됐다. 나토 회원국들은 당초 7월 리투아니아 빌니우스에서 개최되는 정상회의에서 승인되길 기대했지만 스웨덴에 제동을 걸어온 에르도안이 연임하면서 낙관할 수 없게 됐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에르도안의 당선으로 인해 서구는 공포와 희망의 덫에 갇히게 됐다”면서 “그가 러시아로 더 밀착할 것인가에 대한 첫 번째 시험은 7월 나토 정상회의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쪽에선 이번 선거가 에르도안 대통령의 저력을 보여준 동시에 그의 장기 집권 가도에 작지 않은 균열상을 드러냈다는 평가도 나온다. 그는 2018년 대선과 달리 이번에는 1차 투표에서 과반 확보에 실패했고, 지역별로 수도 앙카라와 이스탄불·이즈미르 등 3대 대도시에서 야권 후보인 클르츠다로을루에게 패배했다. 다만 2017년 통과한 대통령제 개헌안에 따라 에르도안이 의회에서 조기 선거를 소집하면 그는 2028년 대선에 한 차례 더 출마 가능하고 여기서 승리하면 2033년까지 집권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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