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쌍방울그룹 대북송금과 관련된 의혹을 1년 넘게 파헤쳐 온 검찰의 숨통을 트는 판결이 나왔다. 수원지법 형사15부(부장 이정재)는 대북 브로커인 아태평화교류협회(아태협) 안부수 회장의 경기도 보조금 횡령(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불법 대북송금(외국환거래법 위반) 등 혐의 대부분을 유죄로 인정해 징역 3년6개월 형을 선고했다.
안 회장 대한 재판은 대북사업 과정에서 그와 호흡을 맞췄던 김성태 전 쌍방울그룹 회장과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 등에 대한 재판의 예고편 격이라고 평가돼 왔다. 그러나 이 재판이 더욱 주목받은 것은 쟁점이 됐던 사실들이 검찰이 계속 수사중인 이 전 부지사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당시 경기도지사)의 ‘제3자뇌물제공’ 혐의 구성의 토대를 이룬다는 점 때문이다.
검찰은 쌍방울그룹이 제3자인 북측에 제공한 금전을 경기도로부터 대북사업권이나 각종 이권 사업권을 받을 것을 기대하고 이 대표 등에게 제공한 뇌물이라고 보고 있지만 이 시나리오가 처벌로 이어지려면 우선 돈을 마련하고 북측에 전달한 목적과 과정이 법원에 의해 ‘사실’로 인정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간 안 회장과 김 전 회장 등은 수사와 재판과정에서 대북송금의 전말을 털어놓았지만 그것이 모두 사실로 인정받을지에 대한 관측은 엇갈려 왔다. 금전이 오간 사건에서 가장 유력한 증거로 평가되곤 하는 수수자(북측)의 진술을 검찰이 받아낼 수 없는 상황인 데다가 금전을 제공케 한 당사자에 해당하는 이 전 부지사와 이 대표가 전면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원은 안 회장과 다른 전 아태협 관계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불법 대북송금 과정 대부분을 사실로 인정해 안 회장의 혐의를 유죄라고 판단했다. 검찰 입장에선 이 전 부지사의 전면 모르쇠를 깨뜨릴 열쇠를 하나 더 얻은 셈이고 이 전 부지사는 그만큼 불리해진 셈이다.
법원 “500만 달러는 대납”
안 회장에 대한 판결문에서 재판부는 2018년 10월29일 경기도가 제1회 아태평화국제대회에 지급한 보조금이 약속했던 5억원에 못미치게 되자 이 전 부지사가 김 전 회장을 안 회장에게 소개했다고 전제했다. 김 전 회장의 쌍방울그룹이 경기도가 주지 못한 2억원을 기부금 형식으로 아태협에 지원했다.
재판부는 경기도가 북한에 지원키로 했던 스마트팜 사업비 500만 달러(50억여 원)를 김 전 회장이 대신 북한의 대남 사업 총괄 기구인 조선아태평화위원회(조선아태위)에 건넸다는 점도 사실로 인정했다. 대북사업 추진 기회를 얻으려 했던 쌍방울 측이 2018년 12월 안 회장과 김 전 회장, 방용철 그룹 부회장 등이 조선아태위 김성혜 실장과 박철 부위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이 돈을 경기도 대신 지급키로 약속하고 방법을 찾아나갔다는 것이다.
안 회장이 북측에 건넨 것으로 파악된 금액은 ▶2018년 12월26일 평양에서 김영철 조선아태위 위원장에게 7만달러(8000만원) ▶2019년 1월24일 중국 선양에서 송명철 조선아태위 부실장에게 14만5040달러와 180만위안 등 한화로 환산하면 총 5억2000여만원이다. 이중 평양에서 김영철에게 건넨 돈은 쌍방울그룹에서 기부받은 4억원 중 일부다. 안 회장은 금전 지급의 대가로 2019년 필리핀에서 열린 제2차 아태평화국제대회와 4·27 남북 정상회담 기념 국제평화대전(평화 마라톤 대회), 옥류관 및 대동강맥주 사업 주체로 선정돼 조선아태위 명의의 사업 동의서를 받아왔다.
안부수와 김성태의 콜라보…스마트팜 지원
2019년 1월24일 안 회장이 송명철에게 지급한 돈은 김 전 회장이 스마트팜 비용 대납 또는 쌍방울그룹-조선아태위 합의 이행 목적으로 북측에 보낸 돈의 일부로 판명됐다. 재판부는 안 회장의 2차 대북송금은 2019년 1월17일 쌍방울그룹과 조선아태위가 맺은 지하자원 개발 등 6개 대상 사업 ‘경제협력 합의’의 대가 차원이라고 봤다. 안 회장이 향후에도 대북사업을 우선 협의할 수 있는 지위를 부여받기 위해 김 전 회장, 방 부회장 등과 함께 외화를 추가 지급하기로 모의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재판부는 북한 산림 녹화를 표면적인 목적으로 내세우고 김성혜가 요구한 금송, 주목 등 조경수를 경기도 보조금으로 사들여 지원하려 했다는 정황도 모두 사실이라고 판단했다. 아태협이 2019년 3월28일 경기도에 금송 2만5000주, 주목 8만5000주 등 묘목 11만주와 밀가루 1651t을 지원하는 내용으로 사업 제안서를 제출한 뒤 이튿날(2019년 3월29일) 이재명 당시 경기지사까지 결재하는 등 신속하게 사업제안을 받아들였다는 내용도 판결문에 담겼다.
이재명, 대북 행보 안부수 행정과 맞물려
쌍방울그룹의 대북송금 관련 의혹을 수사 중인 수원지검 형사6부(부장 김영남) 수사팀은 이번 유죄 판결로 이 사건의 중심인물인 이 전 부지사뿐 아니라 이재명 대표에게 제3자 뇌물죄를 적용할 공간이 확보됐다고 보고 있다.
이 대표의 경기지사 시절 대북사업과 관련한 행보들은 안 회장과 김 전 회장의 움직임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2018년 11월 경기 고양시에서 열린 제1차 국제대회 ▶2019년 3월 아태협의 묘목·밀가루 지원 사업 최종 결재 ▶2019년 11월 김영철에게 경기지사 직인을 찍어 보낸 방북 초청 요청 공문 등이 그런 행적들이다.
2018년 11월14~16일 사흘 간 진행된 1차 국제대회 당시 이 대표는 이 전 부지사와 함께 조선아태위의 리종혁 부위원장, 송명철 부실장 등에게 경기도농업기술원의 스마트팜과 판교 테크노밸리의 스마트 팩토리 등을 직접 소개하며 북측에 통일 경제특구 조성을 제안했다. 쌍방울그룹 핵심 관계자는 “김 전 회장이 김성혜의 대납 제안을 받아들인 것에는 스마트팜이 이 대표가 북측에 적극적 소개한 사업이라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이 대표가 2019년 3월 아태협의 묘목·밀가루 지원 사업을 제안 하루 만에 최종 결재자로 서명한 경위는 검찰이 이 대표를 상대로 추궁하기를 벼르는 대목이다. 2019년 11월 방북 초청 요청 공문은 김 전 회장이 북측에 이 대표의 방북비용 300만달러를 북측으로부터 요구받고 그룹 임직원들을 동원해 쪼개기 송금하기 시작한 시점에 발송됐다. 당시 김 전 회장과 이 대표가 상호 양해 하에 북측에 돈을 보내고 김 전 회장은 대북사업 우선권을, 이 대표는 단독 방북 목적을 실현하려 한 것 아니냐는 게 검찰의 시각이다.
“6월 말 시한 수사 마무리”…이재명 소환 초읽기
최근 검찰은 김 전 회장과 그룹 임직원들로부터 “김용 전 경기도 대변인을 2020년 초 서울 강남구의 고급 일식당에서 만나 음식과 술을 대접했고, 방북비용 대납 등 대북송금에 대해선 수차례 전화로 의견을 나눴다”는 진술을 확보했다고 한다. 김용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은 정진상 전 민주당 정무조정실장과 함께 이 대표가 경기 성남시장 재임 시절부터 보좌한 최측근으로 이 대표가 본인 입으로 ‘내 분신(分身)’이라고 했던 인물이다.
검찰은 경기도와 쌍방울그룹이 사실상 대북 사업 컨소시엄을 구축해 공조했다고 보고 있다. 수사의 종착지인 이 대표 소환이 임박했다는 게 검찰 안팎의 최근 분위기다. 이 전 부지사가 본인의 혐의까지 전부 부인하며 입을 굳게 다물고 있긴 하나 조만간 이 대표를 직접 불러 김 전 회장의 대북송금에 대해 당시 알고 있었는지 등을 조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검찰은 이르면 오는 6월 안에 이 대표를 소환해 기소 여부 가닥을 잡은 뒤 수사를 마무리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