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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이 교사 신고"…'벽에도 귀가 있다' 스탈린 감시 판치는 러

중앙일보

입력

러시아의 한 어린이 호스피스 병동에서 일하는 간호사 카밀라 무라쇼바는 지난 14일(현지시간) 지하철에서 갑자기 체포됐다. 누군가 무라쇼바의 배낭에 달린 우크라이나 국기 배지를 발견한 후 사진 찍어 신고했기 때문이다. 결국 무라쇼바는 '러시아군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됐다.

27일 워싱턴포스트(WP)가 전한 최근 러시아에서 벌어진 일이다. 매체는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이 우크라이나 전쟁 비판 여론을 강력 단속함에 따라 러시아 사회가 과거 이오시프 스탈린(1879~1953)의 독재 시절처럼 '감시 사회'가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정부가 시민들에게 밀고를 부추기면서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신고하며 불신과 적대감이 팽배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 모스크바에 있는 지하철역을 걷는 시민들. 러시아 정부가 전쟁 반대 여론을 강력하게 탄압하면서 시민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신고하는 감시 사회가 되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전했다. 신화통신=연합뉴스

러시아 모스크바에 있는 지하철역을 걷는 시민들. 러시아 정부가 전쟁 반대 여론을 강력하게 탄압하면서 시민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신고하는 감시 사회가 되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전했다. 신화통신=연합뉴스

휴대전화 배경화면도 신고...푸틴, 반역자 숙청 촉구 

40세의 영업 사원 유리 사모일로프는 지난 3월 17일 지하철에서 다른 승객에 의해 신고를 당했다. 사모일로프의 휴대전화 배경 화면이 우크라이나군 아조우(아조프) 연대의 상징이란 이유였다. 그는 '불특정 다수에게 극단주의적 자료를 보여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식당이나 열차 안에서 나눈 사적인 대화나 소셜미디어 게시물, 심지어 비공개 채팅 그룹에서 오간 메시지도 신고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한다. 한 교사는 WP에 아이들이 교사를 신고하거나 교사가 아이들을 신고하고, 교장이 교사나 아이들을 신고하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최근 러시아의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 WP는 러시아인들이 밀고와 체포가 두려워 말조심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AP=연합뉴스

최근 러시아의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 WP는 러시아인들이 밀고와 체포가 두려워 말조심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AP=연합뉴스

러시아가 이처럼 '스탈린식 감시 사회'로 가고 있는 건 러시아 정부의 분위기 조성 때문이라고 WP는 지적했다. 그간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러시아의 생존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내부의 적'을 향한 경고를 반복해왔다. 지난해 3월 연설에선 "날파리 같은 반역자들을 뱉어내야 한다"며 러시아 국민의 자발적인 '숙청'을 촉구하기도 했다.  

러시아 인권단체 OVD-Info에 따르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전쟁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사람은 최소 1만9718명에 이른다. 이외에도 많은 이들이 같은 이유로 당국의 협박을 받거나 일자리를 잃었다고 단체는 밝혔다. 

'벽에도 귀가 있다'...단둘이 있어도 속삭여 

WP는 러시아인들은 신고와 체포에 대한 두려움으로 말조심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친구들과의 점심 모임에서 종업원에게 "식당에 감시 카메라가 있느냐"고 묻거나, 동창회에서도 전쟁 반대 의견을 먼저 꺼내기 조심하는 분위기다. 단둘이 있는 사무실에서도 주변을 살피며 속삭이듯 전쟁 반대 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다.  

스탈린 시대 밀고에 대한 두려움으로 '벽에도 귀가 있다'는 말이 널리 퍼졌었는데, 오늘날 러시아에서도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 러시아 모스크바 거리에 러시아군 관련 광고판이 설치된 가운데 한 시민이 걷고 있다. EPA=연합뉴스

최근 러시아 모스크바 거리에 러시아군 관련 광고판이 설치된 가운데 한 시민이 걷고 있다. EPA=연합뉴스

사회인류학자 알렉산드라 아르키코바는 WP에 "밀고자를 이용한 무작위 체포는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줘 러시아 정부가 사회를 통제하는 강력한 수단이 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카네기 국제평화재단 선임연구원 안드레이 콜레스니코프는 "이런 기류는 전체주의의 징후 중 하나"라며 "일부 사람들은 푸틴 대통령의 관점에서 무엇이 좋고 나쁜지를 따지고 '우리에게 반대하는 사람은 반드시 기소돼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진단했다. 이어 푸틴 정권의 체제 아래 러시아는 점점 더 전체주의 사회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바흐무트전 계기로 러시아 내 전쟁 부정 여론 확산"  

정부의 분위기 조장과 별개로 전쟁에 대한 러시아 내 전반적인 여론은 심상치 않다고 뉴욕타임스(NYT)는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필터랩스 AI사는 지난 2월 말부터 전쟁 사상자에 대한 러시아 여론이 더욱 부정적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0개월 이상 이어진 바흐무트 전투에서 러시아군의 사상자 규모가 상당하다는 소식이 여론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정부 주도의 여론조사 결과는 왜곡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필터랩스 AI는 소셜미디어 게시물이나 텔레그램 메시지 등을 통해 러시아 여론을 추적하고 있다.  

조너선 튜브너 필터랩스 최고경영자(CEO)는 "하나의 사건으로 전쟁에 대한 전반적인 지지가 바뀌기는 어렵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상자에 대한 우려가 계속되면 전쟁에 대한 지지도가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앞서 지난 24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바그너 용병을 이끄는 예브게니 프리고진은 러시아군의 손실이 계속 증가하면 1917년 러시아 혁명과 같은 체제 전복이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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