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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을수 있나"에 하이힐로 비웃다…70대 종갓집 며느리 반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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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지난 19일 시니어 모델이자 예술 인플루언서로 활동하는 윤영주(74)씨가 중앙일보와 인터뷰했다. 김현동 기자. 왼쪽은 윤영주씨가 발간한 에세이 『칠십에 걷기 시작했습니다』. 사진 마음의 숲 제공

지난 19일 시니어 모델이자 예술 인플루언서로 활동하는 윤영주(74)씨가 중앙일보와 인터뷰했다. 김현동 기자. 왼쪽은 윤영주씨가 발간한 에세이 『칠십에 걷기 시작했습니다』. 사진 마음의 숲 제공

스물한 살에 종갓집 며느리가 됐다. 재학 중이던 이화여대에선 결혼했다는 이유로 제적당했다. 그렇게 34대 종손의 부인으로, 두 아이의 엄마로, 시부모에게 극진한 며느리로 수십 년을 살았다. 인생의 무대에서 주인공으로 선 건 70대에 모델에 도전하면서였다. 시니어 모델 윤영주(74)씨의 이야기다. 예술 인플루언서로도 활동하고 있는 그를 소속사 사무실에서 지난 19일 만났다.

그가 처음 모델의 꿈을 꾼 건 70세 되던 해였다. TV에서 90대 노인이 워킹을 배우는 모습을 보고 '20년이나 더 젊은 난 청년이네' 싶었다고 한다. 모델 출신인 며느리에게 부탁해 학원을 알아보고 등록하러 갔더니 돌아온 답은 "걸으실 수 있겠냐"였다. 주눅 들지 않고 매주 이틀씩 나가 꼬박 1년 동안 연습했다.

2019년 한국모델협회 시니어 모델 선발대회에서 포토제닉상을 받았고, 2021년엔 시니어 모델 선발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했다. 그는 "마지막 경연 때 반짝이는 짧은 드레스와 하이힐을 신고 등장했을 때 심사위원들이 파격에 통쾌해 했다"고 말했다.

윤씨는 70세가 되던 해 TV에서 90대 노인이 워킹을 배우는 모습을 보고 모델의 꿈을 꿨다. 김현동 기자

윤씨는 70세가 되던 해 TV에서 90대 노인이 워킹을 배우는 모습을 보고 모델의 꿈을 꿨다. 김현동 기자

육 남매 중 막내인 그는 어릴 적부터 당차고 끼도 많았다. 중학교 시절, 집안 곳곳에 빨간 압류 딱지가 붙었을 정도로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지만 한 번도 기죽지는 않았다고 한다. 둘째 오빠가 군 제대 후 복학해야 하니 대학에 보내줄 수 없다는 부모님에게 "내가 아르바이트해서 등록금을 마련하겠다"고 설득했다. 이화여대 불문과에 합격한 그는 입학식 날 입을 옷이 마땅치 않자 아버지의 영국제 양복을 리폼(reform)했다. 몸에 딱 붙는 이른바 '맘보 바지'와 더블 버튼 재킷은 친구들뿐 아니라 교수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대학교 3학년 때 결혼을 했는데.
아이들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부를 했는데 힘들었다. 동아리, 미팅 같은 캠퍼스 생활도 없었다. 당시 친오빠의 친구 중 한 명이 결혼하자고 여러 번 이야기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봤던 사람이니 믿고 결혼했다. 시어머니가 점을 봤는데 그해에 꼭 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셨다고 해서 결심한 게 컸다.
남편이 종손인 건 알았나.
몰랐다. 시부모님과 시누이 넷, 시동생까지 7명과 같이 살았다. 결혼한 지 일 년쯤 됐을 때 시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시부모님이 제사를 물려받았다. 1년에 명절 포함 제사를 13번 지냈다. 그때마다 강원도에서 친척들이 수십 분이 오셨다. 오시면 며칠씩 자고 가셔서 (이 오신 분들의 침구에 쓰기 위해) 자주 목화솜을 틀러 다녔던 기억이 난다.
당시엔 결혼을 금지하는 교칙이 있었다.
두 학기 남았을 때라 몰래 다니려고 했다. 그런데 소문이 났다. 학과장이 따로 불러서 "봐주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고 하더라.
지난해 5월 잡지 '보그'에 실린 윤영주씨의 모습. 사진 보그 제공

지난해 5월 잡지 '보그'에 실린 윤영주씨의 모습. 사진 보그 제공

주부로 사는 동안에도 좋아하는 것을 놓지 않았다. 집 근처 무형 문화재 전수 회관에서 강령 탈춤을 배웠고, 틈틈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미술 강의를 찾아 들었다. 자녀가 초·중생일 무렵엔 지인 추천으로 TV 교양 프로그램의 리포터로 일하기도 했다. 취재·방송을 잘한다는 평을 받으며 한 방송사의 공채 리포터로 뽑히기도 했지만, 남편을 비롯해 가족의 반대로 그만둬야 했다.

윤씨의 인생 2막이 본격 펼쳐진 건 2003년, 이화여대가 금혼 교칙을 삭제하면서였다. 학부 졸업장을 따고도 미련이 남아 홍익대 대학원에 진학해 미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뒤늦게 시작한 공부는 쉽지 않았지만, 전철에서도 책을 읽을 정도로 재밌었다. 하지만 박사 과정 중 남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시력마저 나빠졌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 그를 다시 일으킨 게 모델의 꿈이었다.

그는 최근 모델뿐 아니라 패션·문화·예술 인플루언서로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다. 지난해 패션 브랜드 르메르가 미국 포크 아티스트 조셉 엘머 요아쿰을 기리는 전시를 열었을 때 도슨트 역할을 맡았다. 지난 2월엔 인생을 담은 에세이 『칠십에 걷기 시작했습니다』도 펴냈다.

끊임없이 도전해온 그가 망설이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그는 "좋아하는 일에 몰입하다 보면 취미가 특기 되고, 특기가 무기 된다"고 말했다.

살아보니 가장 작은 손해는 물질적인 것이더라고요. 당장 성공의 길이 안 보인다고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자신에게 투자하고, 위험한 일도 저질러봤으면 좋겠어요. 재밌는 삶을 살아보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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