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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차이나 신경진의 차이나는 차이나

관우도 못 받는 호사…마오쩌둥이 흠모한 '조조'가 깨어났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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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신경진 베이징 총국장

신경진 베이징 총국장

삼국지 조조(曹操, 155~220)의 진짜 무덤인 고릉(高陵)이 지난 4월 29일 일반에 처음 공개됐다.

지난 20일 베이징에서 남쪽으로 540여㎞ 떨어진 허난성 안양시 인두(殷都)구 시가오쉐(西高穴)촌의 고릉박물관을 찾았다. 베이징에서 고속철도로 두 시간 거리였다. 입구에 15.6m 높이의 조조 기마상이 웅장했다. 관우(關羽)·제갈량(諸葛亮) 등 삼국지 영웅 누구도 누리지 못한 1만8488㎡ 초대형 박물관에서 말을 탄 채 사람들을 맞는 조조의 표정은 마치 흡족한 듯 했다. 조조와 동시대 인물평론가였던 허소(許劭, 150~195)는 “태평하다면 간사한 도적, 난세라면 영웅(君淸平之姦賊 亂世之英雄)”이라고 평했다.

지난 20일 찾아간 중국 허난성 안양시 인두구 시가오쉐촌의 조조 고릉 유적지 박물관. 입구에 15.6m 높이의 조조 기마상에 마오쩌둥의 필체로 ‘위무휘편(魏武揮鞭)’ 네 글자가 새겨져있다. 안양=신경진 특파원

지난 20일 찾아간 중국 허난성 안양시 인두구 시가오쉐촌의 조조 고릉 유적지 박물관. 입구에 15.6m 높이의 조조 기마상에 마오쩌둥의 필체로 ‘위무휘편(魏武揮鞭)’ 네 글자가 새겨져있다. 안양=신경진 특파원

조조의 고릉박물관 제1전시실에 전시 중인 조조의 유물. 왼쪽은 조조가 호랑이 사냥에 쓰던 큰 창의 이름인 ‘위무왕상소용격호대극(魏武王常所用挌虎大戟,)’라고 쓰인 돌 명패. 오른쪽 돌 명패에는 조조의 짧은 창을 지칭하는 ‘위무왕상소용격호단모(魏武王常所用挌虎短矛)’ 문구가 쓰여있다. 안양=신경진 특파원

조조의 고릉박물관 제1전시실에 전시 중인 조조의 유물. 왼쪽은 조조가 호랑이 사냥에 쓰던 큰 창의 이름인 ‘위무왕상소용격호대극(魏武王常所用挌虎大戟,)’라고 쓰인 돌 명패. 오른쪽 돌 명패에는 조조의 짧은 창을 지칭하는 ‘위무왕상소용격호단모(魏武王常所用挌虎短矛)’ 문구가 쓰여있다. 안양=신경진 특파원

기마상에는 마오쩌둥(毛澤東) 특유의 필체로 새겨진 ‘위무휘편(魏武揮鞭·위 무제가 채찍을 휘둘렀다)’ 네 글자가 적혀있다. 마오가 1954년 여름 베이다이허에서 지었던 ‘낭도사·북대하(浪淘沙·北戴河)’에 나온 시구이다. 이보다 오래 전인 3세기에 조조가 오랑캐 오환(烏桓)을 토벌한 뒤 시 ‘관창해(觀滄海)’를 지었던 바로 그 바닷가에서 마오가 지은 시였다. 시는 다음과 같다.

중국 허난성 안양의 조조 고릉박물관 지하 1층 제2전시실에 걸려있는 관도전투 그림. 안양=신경진 특파원

중국 허난성 안양의 조조 고릉박물관 지하 1층 제2전시실에 걸려있는 관도전투 그림. 안양=신경진 특파원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지난 일은 천 년이 넘었고, 위 무제는 채찍을 휘둘렀다.(往事越千年 魏武揮鞭)
동쪽 갈석에 올라 시 한 수를 남겼다.(東臨碣石有遺篇)
스산한 가을바람 지금도 여전하지만 주인공이 바뀌었구나(蕭瑟秋風今又是 換了人間)”

마오는 시의 마지막 구의 ‘환료인간(換了人間)’ 네 글자로 조조의 후계자를 자처했다. 고릉박물관은 마오의 이 시를 따라 전시 테마를 정했다. 쿵더밍(孔德銘) 박물관장은 “박물관 기본 전시 명칭을 ‘왕사월천년(往事越千年)’으로 정했다”며 “마오쩌둥 시의 명구절에서 땄다”고 소개했다. “전시의 주제는 고고·역사·사회학의 연구 성과와 고릉에서 출토된 문물을 이용해 조조와 관련된 한(漢)·위(魏) 나라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72개 가짜 무덤은 소설 이야기

조조를 놓곤 그가 가짜 무덤을 만들었다는 얘기가 후세에 계속됐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선조가 “조조가 가짜 무덤을 만들었다는데 사실인가”라고 신하에게 묻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런데 가짜 무덤은 소설 속 이야기이다. 명(明)대 작가 나관중은 『삼국연의』 78장에서 “조조는 거짓 무덤(疑塚) 일흔 두 개를 만들게 했다. 후대에 자신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 모르게 하여 도굴을 피하려 함이었다”고 썼다.

실제 역사는 다르다. 송(宋)대 이전까지 조조 묘의 위치는 알려져 있었다. 진수(陳壽)는 『삼국지』 ‘무제기’에 “서문표(西門豹, 전국시대 척박했던 땅을 옥토로 개간한 업(鄴)성의 수령) 사당의 서쪽 언덕에 능을 만들고 봉분도 나무도 심지 말라”는 조조의 유언을 기록했다. 조조의 아들 위(魏) 문제(文帝) 조비(曹丕)는 부친의 검약 정신을 받든다며 고릉에 세웠던 건물까지 모두 허물었다.

645년 당(唐) 태종 이세민(李世民)이 조조묘를 찾았다. 고구려를 ‘정벌’하러 지나던 길이었다. “위기가 닥치면 제도를 바꿨고, 적을 헤아려 허를 찔렀다. 장수로는 지혜가 넘쳤으나 황제로는 부족했다(臨危制變料敵設奇 一將之智有餘 萬乘之才不足).” 송대 『자치통감』 197권에 따르면 당 태종은 조조를 한 수 아래로 평가했다.

송 태조 조광윤(趙匡胤)은 역대 제왕의 묘 10개를 꼽아 보호를 명령했다. 조조의 고릉도 포함시켰다. 여진의 금(金)이 고릉 지역을 차지하자 가짜 조조묘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공교롭게도 고릉에서 남쪽으로 40㎞ 떨어진 곳엔 금과 싸워 한족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악비(岳飛)의 묘가 있다.

조조 고릉박물관의 묘실로 들어가는 신도(神道). 안양=신경진 특파원

조조 고릉박물관의 묘실로 들어가는 신도(神道). 안양=신경진 특파원

고릉박물관 전시실은 지하에 조성돼 있다. 길이 33m, 폭 5m의 신도(神道, 묘로 가는 길)를 따라 관람객을 맞는다. 먼저 지하 2층의 제1전시실 ‘고릉중현(高陵重現)’. 2000년대 진행된 고릉의 발굴 과정이 전시돼 있다. 조조묘 확인에 결정적인 증거가 된 ‘위무왕상소용격호대극(魏武王常所用挌虎大戟)’이 적힌 석패(石牌)와 조조의 돌베개가 전시되어 있다. 위 무왕 조조가 늘 사용한 ‘호랑이를 사냥하던(挌虎·격호)’ 큰 창이라는 뜻이다. 후한 말기에는 실제 호랑이 사냥이 유행했다고 한다. 조조가 양자 조진(曹眞)을 최정예 기병대 호표기(虎豹騎)에 임명한 이유가 호랑이 사냥에 능했기 때문이었다. 조조가 쓰던 수정주(水晶珠, 수정구슬), 동련(銅鏈, 동으로 만든 사슬), 동인(銅印, 동으로 만든 인장) 등 핵심 유물이 전시 중이다.

지하 1층 제2전시실의 테마는 ‘초세지걸(超世之杰)’이다. 조조의 정치·군사·문학 방면의 업적을 모았다. “동한 말기의 걸출한 정치가, 군사가, 문학가, 삼국 조위(曹魏) 정권의 실제 건립자이자 서진(西晉) 왕조가 천하를 통일하는 기반을 닦은 인물”이라고 재평가했다.

213년 조조가 단점이 있다는 이유로 재능 있는 인재의 선발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명한 ‘취사물폐편단령(取士勿廢偏短令)’이 고릉박물관 지하 1층 제2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다. 안양=신경진 특파원

213년 조조가 단점이 있다는 이유로 재능 있는 인재의 선발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명한 ‘취사물폐편단령(取士勿廢偏短令)’이 고릉박물관 지하 1층 제2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다. 안양=신경진 특파원

“단점 때문에 인재 놓치지 말라”

전시실은 조조의 현실주의 전쟁관과 능력주의 인재관을 강조했다. 손자병법의 주석서를 펴낼 정도로 병법에 밝았던 조조는 “무력에 의지하면 멸망하고, 문에만 의지하면 망한다(恃武者滅 恃文者亡)”고 썼다. 힘에 기반한 평화를 신봉하면서도 무력을 남용해 전쟁을 일삼는 데는 반대했다. 조조 병법의 키워드는“의로움으로 군대를 움직인다(兵以義動)”였다.

조조는 철저한 능력주의 인재관을 따랐다. 단점 때문에 재능 있는 자를 놓치지 말라던 213년 ‘취사물폐편단령(取士勿廢偏短令)’과 인재를 천거할 때는 도덕성에 구애받지 말라는 ‘거현물구품행령(擧賢勿拘品行令)’ 문구가 박물관 곳곳에 내걸려 있다.

고릉에서는 세 개의 두개골과 팔다리뼈가 발굴됐다. 남성 한 명 여성 2명으로 추정됐다. 조조로 판정한 남성은 60대였고, 여성은 50대와 20대로 밝혀졌다.

중국 인공지능(AI) 기술을 이용해 허난성 안양시 고릉에서 발견된 조조묘 유골을 토대로 만든 조조의 초상(오른쪽). 왼쪽은 기존에 전해 온 조조의 영정. 출처=서우후

중국 인공지능(AI) 기술을 이용해 허난성 안양시 고릉에서 발견된 조조묘 유골을 토대로 만든 조조의 초상(오른쪽). 왼쪽은 기존에 전해 온 조조의 영정. 출처=서우후

남성 유골을 토대로 해서 인공지능(AI) 기술을 이용해 복원했다는 조조 초상화가 얼마 전부터 중국 SNS에서 인기다. 5세기 『세설신어(世說新語)』 ‘용지(容止)’편에 따르면 조조는 추남이었다. 흉노 사신에게 추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부하를 앞세운 뒤 호위병으로 분장했다. 회담을 마친 뒤 사신에게 조조의 인물됨을 물었다. “위왕의 덕망도 고아했지만, 뒤에 서 있던 사람이 진정한 영웅 같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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