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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세컷칼럼

민주당 이름에서 ‘민주’ 떼야 하나

중앙일보

입력

서승욱 기자 중앙일보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다시, 민주주의!"

 지난주 5·18 민주화운동 43주년을 맞아 더불어민주당이 내건 현수막이다. 각 당협위원회 명의로 전국 방방곡곡에 깔렸다. "치욕적인 강제동원 셀프배상, 이완용의 부활인가" "대통령은 오므라이스, 국민은 방사능 밥상" 등 원색적 표현으로 비판받은 민주당발 다른 현수막에 비하면 꽤 고상하고 점잖다.

 비상한 행동을 할 때는 늘 이유가 있다. 독재 정권과 맞섰던 영광스러운 기억의 소환, 민주화 과정에서의 지분 강조, 중도층의 향수 자극이 이번 현수막의 목적이리라. 학생 운동과 민주화 운동으로 한국 사회의 성취에 기여했다는 권리금 영수증을 들이대는 느낌이랄까. 물론 전부가 허풍은 아니다. 자유와 인권, 용서와 통합, 민주주의란 오월 정신의 가치가 확실히 민주당에 더 어울렸던 시기가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그랬고, 꽤 최근까지도 그랬다.

 "다시, 민주주의!"

 그런데 이번엔 느낌이 다르다. 민주주의와 민주당의 궁합이 유난히 어색하고 공허하다. 민주당이 직면한 참혹한 현실 때문이다. 이제 국민에게 무덤덤한 일상처럼 돼 버린 이재명 대표의 사법 리스크가 시작이었다. 기소된 당 대표는 법원을 전전한다. 주변에서 다섯 명이나 극단적 선택을 했는데도 사과와 책임에 인색하다는 인상을 줬다. 그 와중에 2021년 전당대회에서의 쌍팔년도식(자유당 시절) 돈봉투 살포 의혹이 터졌다. 녹취록 속 등장인물들의 품위 없는 대화는 국민을 전율하게 했다.

 돈봉투의 수혜자인 전직 대표는 당이 무너지는 위기에도 파리에서 웃으며 인터뷰를 했다. 압박에 떠밀려 귀국한 뒤엔 영웅처럼 행동했다. 상임위 질의시간까지 쪼개 휴대전화를 눌러 댄 젊은 '코인 타짜' 의원의 등장은 당의 숨통을 끊을 듯한 결정타였다. 구멍 난 운동화가 동원된 '빈곤 코스프레'에 젊은이들은 멘붕에 빠졌다. 윤석열 대통령은 5·18 기념사에서 "오월의 정신을 계승한다면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모든 세력과 도전에 당당히 맞서 싸워야 한다"고 했다. 민주당은 졸지에 자유민주주의 파괴 세력으로까지 몰리고 말았다.

5·18 맞아 "다시, 민주주의" 외쳐
잇따른 참사에 공허한 메아리뿐
옛 민주당의 명예가 짐이 된 오늘

 "다시, 민주주의!"

 이 현수막을 본 누군가가 "민주당의 가장 큰 적은 과거의 민주당"이라고 했다. 도덕적 자신감은 과거 민주당의 가장 믿는 구석이었다. 법조인 출신이나 관료 출신, 소위 출세한 사람들이 줄을 섰던 상대 당과는 확실히 달랐다. '희생' '헌신' '봉사' '체면' '양심', 이런 단어들 앞에선 민주당이 더 당당했다. 이견을 끌어안을 줄도 알았다. 2014년 새정치민주연합 시절까지만 해도 출입기자들이 외우기 벅찰 정도로 계파가 많았다. 친문 핵심, 그냥 친노계, 정세균계, 민평련(김근태계), 안희정계, 박원순계, 김한길계, 안철수계, 손학규계…. 이들이 모두 한 지붕 아래에 있었다. 늘 시끄러웠지만 어쨌든 해법을 찾아 나갔다. 비명계 의원들의 지역구까지 찾아간 수박 깨기 퍼포먼스도, "민주당의 70%는 쓰레기 의원들"이란 저주의 문자 폭탄도 찾기 어려웠다. 상임위에서 코인 거래를 한 동료 의원을 감싸는 막무가내식 동료애도 없었다.

 그러나 과거 민주당의 강점은 현재 민주당엔 고통일 뿐이다. 과거의 헌신도, 명예도, 다양성도, 도덕성도 이제 견딜 수 없는 짐이 됐다. 그래서 소리를 지른다. "진보라고 꼭 도덕성을 내세울 필요가 있느냐"라고, "진보는 돈 벌면 안 되는가"라고 떠들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다시 민주주의!"는 막다른 골목에서 내뱉는 역설적인 비명으로,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란 자기 고백으로 들린다.

 과거가 부담스러운 그들은 머지않아 민주당이란 이름까지 거추장스럽게 여길지 모른다. 위장 탈당 등 기상천외한 꼼수와 힘으로 밀어붙이기 등 '민주'와는 이미 거리를 둬왔던 그들이기에 이름 바꾸는 일이 그다지 큰일이 아닐 수 있겠다 싶다. 어제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4주기에 하기엔 참 서글픈 얘기다.

글=서승욱 논설위원  그림=김아영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