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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 장인' 中교수의 20년 서울살이가 전한 희망의 메시지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중앙일보

입력

"나라의 사귐은 국민 간의 친함에 있다(國之交在於民相親)". 한중이 또 다른 30년을 여는 첫해 2023년을 맞아, '이사 갈 수 없는 영원한 이웃' 중국에서 건너와 한국에 자리잡은 이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한국에서의 20년을 회고하며 최근 저서 『안개꽃 별이 되다』를 펴낸 취샤오루(曲曉茹·곡효여) 국민대 중국학부 부교수가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한국에서의 20년을 회고하며 최근 저서 『안개꽃 별이 되다』를 펴낸 취샤오루(曲曉茹·곡효여) 국민대 중국학부 부교수가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세상 어디에 있든지 마음이 편안하다면 그곳이 바로 내 고향이다". 21년 전, 중국 다롄(大連)을 떠나 서울에 정착한 취샤오루(曲曉茹᛫곡효여)의 저서 『안개꽃 별이 되다』 표지에 적힌 말이다. 지난 4월, 최근 '제2의 고향' 한국에서의 20년을 회고하며 책을 펴낸 국민대 중국학부 부교수 취샤오루를 만났다. 현 대학교수이자 두 고등학생 아들의 엄마이기도 한 취샤오루는 이날 인터뷰에서 유창한 한국어와 솔직한 입담으로 20년에 걸친 한국살이 에피소드를 쉴 새 없이 들려줬다. 매운 음식에 쩔쩔매고 서툰 한국어에 실수투성이였던 날들에서 못 담그는 김치가 없는 진정한 '김치 장인'으로 거듭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울고 웃긴 이야기가 한가득했다. 취샤오루는 낯선 땅에 적응하고 삶을 살아내느라 고군분투하다 한국인 남편을 만나 서울에 뿌리내리고, 비바람과 우여곡절을 겪으며 온전히 한국 사회로 녹아들었다. 다른 다문화 가정에도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고 밝힌 취샤오루는 국제결혼 가정의 일원으로서 마주했던 편견이나 어려움, 이를 극복해 온 과정과 노력을 소개했다. 다문화에 대한 한국의 인식과 제도적 문제점에 관해서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한·중 관계 악화가 아이들에게 가져온 변화와 교육 현장의 실제 상황, 그리고 교육자로서의 소신도 가감 없이 밝혔다.

취샤오루(曲曉茹·곡효여)국민대 중국학부 부교수의 저서 『안개꽃 별이 되다』. 사진 좋은땅 출판사

취샤오루(曲曉茹·곡효여)국민대 중국학부 부교수의 저서 『안개꽃 별이 되다』. 사진 좋은땅 출판사

한국에 오게 된 계기는?
2001년 2월, 우연한 기회로 고(故) 최은택 한국 축구 국가대표 감독님이 설립한 회사의 초청을 받아 2주 정도 한국을 방문했었다. 당시 나는 고향인 다롄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었는데, 중국에 돌아가서도 그 2주간의 경험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일본계 회사에 다녔던 터라 내 상사도 일본 분이었는데, 내게 한국에 가서 한번 살아보라고 적극적으로 추천하셨다. 한국행 편도 비행기표를 직접 사주실 정도로 나를 응원해 준 정말 고마운 분이었다. 2002년 1월, 결국 고민 끝에 나는 사직서를 내고 28살의 나이로 한국어는 한마디도 몰랐지만 무작정 한국에 왔다. 당시 서울엔 1998년 먼저 한국으로 유학을 온 친언니가 살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방학동 반지하 빌라인 언니 집에서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어땠는지?  
먹는 것과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 다롄은 매운 음식이 별로 없는데, 한국은 '고추장의 나라' 같았다. 처음 왔을 때 말이 안 통하는 것도 고역이었지만, 매운 음식이 많아 도통 내가 먹을 수 있는 게 없어 힘들었다. 닭갈비는 물에 씻어 먹고, 라면은 소스를 빼고 간장을 넣어 끓여 먹었다. 한국어를 전혀 몰랐을 때는 지하철과 버스를 반대로 타거나 종점까지 가기 일쑤였다. 한번은 1호선을 반대로 타서 인천까지 갔는데, 한 대학생이 방학역까지 같이 와줘서 정말 감동했다. 지하철에서 취객에게 봉변당할 뻔한 적도 있는데, 다행히 주변 분들이 나서서 도와주셨다. 다만 당시 치한을 냅다 지하철 밖으로 던져버린 분과 쏟아진 소지품을 주워 주며 나를 위로해 주신 분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그저 감사하단 말만 반복했던 건 지금 생각해도 참 아쉬운 부분이다. 
중국 전통의상을 입고 중국어 강의하는 취샤오루. 사진 본인제공

중국 전통의상을 입고 중국어 강의하는 취샤오루. 사진 본인제공

한국어는 어떻게 배웠나?
한국에 오자마자 한국어학당을 두 달 다녔다. 하지만 학비가 너무 비싸서 곧장 일을 시작했다. 중국에서 4년간 일한 돈을 부모님께 다 드리고 한국에 왔기 때문에 생활비와 학비를 직접 벌어 써야 했다. 나는 어학당에 가야만 한국어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회에 직접 들어가 배우는 게 훨씬 더 빠르다. 나도 책이나 어학당이 아니라 사회생활을 통해 한국어를 배웠다.  
얼마 전 책을 냈다고 들었다.
『안개꽃 별이 되다』는 20년 넘게 한국에 살면서 일기식으로 기록한 것들을 한 권으로 정리한 책이다. 특히 국제결혼 가정의 일원으로서 겪었던 어려움이나 문화 차이 그리고 이를 해결해 온 방법과 한국 사회에 어떻게 적응했는지 등을 적었다. 한국 사람끼리 해도 힘든 결혼을 언어᛫국적᛫문화가 다른 사람끼리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나. 하지만 열심히 노력하고 적응하다 보면 충분히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갈 수 있다는 용기와 희망을 주고 싶었다. 다른 다문화 가정에도 '꾸준히 노력하면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이 책을 쓰게 됐다.
취샤오루가 아들과 함께 TBS 교통방송에서 중국어 라디오 녹음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 본인제공

취샤오루가 아들과 함께 TBS 교통방송에서 중국어 라디오 녹음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 본인제공

책을 보니 한국 사회에 상당히 활발하게 참여했던데.    
중국어 강의, 라디오 방송, 중국어 더빙이나 내레이션, 중국 문화 관련 행사 진행 등 여러 가지 일을 했다. 아이들 학교 봉사활동이나 녹색 어머니회, 운동회, 방과 후 수업 등 자연스럽게 학생 그리고 학부모들과 만나고 소통하면서 한국어도 많이 익혔다. 나와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안 통하면 거부감이 들 수도 있는데, 남을 도와주는 일은 누구도 거부하지 않는다. 내가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는 이유다. 최근에는 환경에도 관심이 커져서 아이들과 함께 쓰레기 줍기 등 여러 캠페인도 몇 년째 하고 있다. 방과 후 수업의 경우는 내가 성북구청 담당 부처에 직접 찾아가 재능 기부를 하겠다고 자원했다. 중국학과 교수라는 장점을 살려 집 근처 학교에서 태극권 등 중국 문화 관련 수업을 무료로 가르치기도 했다.  
국민대에서 주최한 제2회 한중문화제에서 방송인 장위안과 함께 사회를 보고 있는 취샤오루. 사진 본인제공.

국민대에서 주최한 제2회 한중문화제에서 방송인 장위안과 함께 사회를 보고 있는 취샤오루. 사진 본인제공.

남편과는 어떻게 결혼하게 됐나?
중국어를 가르쳤던 학생의 소개로 남편을 만났다. 학교 선배이자 회사 동료인데 괜찮은 사람이니 결혼은 안 하더라도 한국어 공부하는 셈 치고 만나보라며 내 등을 떠밀었다. 나는 처음에 불순한(?) 의도로 소개팅에 나갔는데, 남편은 나를 만나기 위해 중국어 세 마디를 밤새워 연습해 왔더라. 그런 남편에게 뭔가 진지함을 느꼈고, 그렇게 1년 넘는 연애 끝에 2004년 결혼했다. 사실 나는 1998년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에서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대사를 보곤 한국 사회가 상당히 가부장적이라고 느꼈었다. 한국 남자와 결혼하게 될 거라곤 전혀 생각 못 했다.  
연애 시절은 어땠나?
나는 한국어가 안 되고 남편은 중국어를 몰라서 한중, 중한사전을 항상 들고 다녔다. 영화 한 편 보기도 쉽지 않았다. 한번은 영화 '반지의 제왕'을 보러 갔는데, 영어를 몰라 3시간 내내 너무 힘들었다. 중국 영화 '무간도'가 개봉했다고 해서 기쁜 마음으로 보러 갔는데, 영화 내내 홍콩말만 나와서 하나도 못 알아듣고 나온 적도 있다. 그래서 그 뒤론 1년 내내 도서관에서 데이트했다. 나는 공부하고 남편은 옆에서 책을 읽었다.  
2014년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 수여식 당일 취샤오루의 모습. 사진 본인제공

2014년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 수여식 당일 취샤오루의 모습. 사진 본인제공

석᛫박사 과정을 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는지?
한국에 와서 기업체를 대상으로 중국어 강의를 많이 했는데, 학생들이 어법 관련 질문을 할 때마다 제대로 대답을 못 했던 게 공부를 더 하게 된 계기다. 전문적으로 배워서 더 잘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사실 석사 과정 당시에 아이를 가져서 육아와 공부를 동시에 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박사 과정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남편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적극적으로 나를 밀어줬다. 발표 같은 걸 준비할 때면 남편이 자료를 먼저 읽고, 쉬운 말로 설명해 줬다. 새벽 3시에 발표문을 고쳐 달라고 해도 밤새 도와주고 뜬 눈으로 출근하기도 했다. 남편은 나를 성장시키기 위해 정말 최선을 다한 것 같다. 한국에서 20년 넘게 사는 동안 남편 덕분에 새로운 내가 됐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한·중 국제결혼 부부들에게 조언이 있다면?
요즘 한국 사람들은 대체로 중국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 많은 것 같다. 그런데 만약 아내 혹은 남편이 중국 사람이면 상대방의 문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좀 필요한 것 같다. 그리고 한쪽만 노력해선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나 같은 경우는 한국 사회에 깊숙이 들어와 한국 문화를 직접 경험하고 받아들인 편이다. 예전에는 김치도 시어머니가 만들어 주시는 것만 먹었는데, 이젠 내가 직접 담가 먹는다. '김치 장인'까진 아니라도 할 줄 아는 김치 종류가 꽤 다양하다.  
취샤오루가 직접 담근 김장 김치. 사진 본인제공

취샤오루가 직접 담근 김장 김치. 사진 본인제공

결혼할 때 부모의 반대는 없었는지?
시부모님의 반대가 좀 있었다. 제천의 작은 마을에서도 아들 넷을 훌륭하게 키워냈다고 자부하시는 분들이었다. '우리 아들이 어디가 모자라서 외국인과 결혼해야 하나'라는 생각을 어느 정도 갖고 계셨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시부모님을 직접 찾아뵙고 '정면 돌파'를 하자 생각이 바뀌셨다. 어머님이 되려 우리 결혼을 서두르셨다. 사실 책에서도 언급했지만, 한국에 나이가 좀 있으신 분들은 여전히 중국이나 베트남 등이 가난한 나라라는 편견을 갖고 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런 인식은 엄연히 존재한다. 사람을 보지 않고 나라만 보는 셈이다. 그런 편견과 꼬리표는 결국 아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다문화 가정을 향한 인식이 내 책을 통해 조금이나마 개선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다문화 가정의 외국인 배우자들도 한국 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라는 조언을 하고 싶다.  
EBS 중국어 프로그램 담당 강동걸 PD(오른쪽)와 취샤오루. 사진 본인제공

EBS 중국어 프로그램 담당 강동걸 PD(오른쪽)와 취샤오루. 사진 본인제공

자녀들 언어 교육은 어떤 식으로 했나?
친정 어머니가 오래 한국 계셔서 그런지 지금은 아이들이 중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많은 다문화 가정의 외국인 엄마가 모국어를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하지만 기왕에 한국에 살면 어차피 엄마 빼고는 다 한국어를 쓰기 때문에 엄마는 아이들에게 모국어를 쓰려고 노력하는 게 좋은 것 같다.    
다문화 가정의 교육과 관련해 조언이 있다면?
대만에선 다문화 가정 아이들에게 초등학교 때부터 그 나라의 문화와 언어를 가르친다. 베트남, 몽골, 필리핀 등 10개 국어를 배울 수 있다고 한다. 초등학교는 필수과정이고 중᛫고등학교는 선택과목이다. 중요한 시기에 아이들이 다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게 가르친다는 점에서 상당히 좋은 제도라 생각한다.  
한국 사회의 다문화에 대한 인식은 어떤가?
한국 사람은 피부색이나 국가 경제력으로 상대방을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에선 부유한 나라에서 온 사람과 결혼하면 '국제결혼 가정', 가난한 나라에서 온 사람과 결혼하면 '다문화 가정'이라고 한다. 차별적인 명칭은 되도록 피하고, 사회적인 논의를 통해 인식을 개선해 나갔으면 좋겠다. 대만에선 대만 내 거주 또는 정착한 외국인을 '신주민'이라고 부른다. 다문화 구성원을 부르는 명칭이나, 다양성에 대한 논의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실질적으로 점차 다문화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한국에서도 참고할 만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서울 숭덕초등학교 방과 후 교실에서 중국 문화 수업을 진행 중인 취샤오루. 사진 본인제공

서울 숭덕초등학교 방과 후 교실에서 중국 문화 수업을 진행 중인 취샤오루. 사진 본인제공

한국 사회에 사는 다문화 가정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뭔가?
내 주변의 다문화 가정을 보면 대부분 경제적으로 어려운데 다자녀 가구인 경우가 많다. 현실에 맞지 않는 지원 정책도 문제다. 방과 후 수업료 면제같이 실효성 없는 지원보다 외국인 엄마들의 능력과 사회성을 키워줘야 한다. 그리고 외국인 배우자의 가족이 비자를 받기 까다로운 것도 힘든 점 중 하나다. 나도 친정 어머니 비자가 나오지 않아 상당히 고생했었다. 친정 엄마가 육아를 도와주면 외국인 여성들이 일자리도 구하고 사회에 적응하기도 쉬울 텐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외국인 엄마가 육아 때문에 일을 못 해 경제적인 어려움을 벗어나지 못하고, 안정감이 없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 더 적응을 못 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두 아들과 함께 봉사단체 도담도담이 주관한 안전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는 취샤오루(가운데). 사진 본인제공

두 아들과 함께 봉사단체 도담도담이 주관한 안전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는 취샤오루(가운데). 사진 본인제공

자녀들도 어려움을 겪었나?
한때 큰아이가 한국말이 좀 어눌했는데, 학교 폭력을 당한 적이 있다. 머리채를 잡고 침을 뱉었다고 하더라. 작은 아이는 학교에서 맞아 안경이 부러진 적도 있다. 최근엔 한·중 간 분위기가 안 좋아서 한국을 떠나 말레이시아 등 나라로 이민 가는 가족들도 많이 봤다. 혹여나 아이들이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할까 봐 두려워서라고 한다. 나는 이게 피하거나 숨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에게 어디서든 당당하라고 가르쳤다. 아이들도 학교에서 아빠는 한국인이고 엄마는 중국인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대신 무슨 일이 있으면 반드시 집에 와서 얘기하라고 일러뒀다.        
언제부터 한·중 관계가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느끼기 시작했나?
최근 몇 년 정치적인 상황의 영향이 큰 것 같다. 요즘 아이들이 유튜브를 많이 보다 보니 중국에 대한 인식이 많이 안 좋아졌다. 판단 능력이 미성숙한 아이들이 근거 없고 선동적인 뉴스에 노출되고 있다. 우리 아이들에겐 유튜브를 최대한 보지 말고 어떤 일에 관해 판단이 잘 안될 때는 꼭 물어보고 행동하라고 가르쳤다. 사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중국 여행도 많이 하고, 중국어도 열심히 가르쳤다. 집에서는 항상 중국 요리와 한국 요리 두 가지를 만들어 먹였다. 하지만 요즘 들어 아이들의 중국에 대한 호감이 많이 떨어진 상태다. 
한국에서의 20년을 회고하며 최근 저서 『안개꽃 별이 되다』를 펴낸 취샤오루(曲曉茹·곡효여) 국민대 중국학부 부교수가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한국에서의 20년을 회고하며 최근 저서 『안개꽃 별이 되다』를 펴낸 취샤오루(曲曉茹·곡효여) 국민대 중국학부 부교수가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한·중관계에 대한 평소 생각이나 기대가 있다면?
한·중 관계를 개선하는 데 나라 간의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개인이 가정이나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최대한 긍정적인 면을 자주 보여주도록 노력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나는 수업 시간에 한·중 간 여러 갈등에 대해 학생들에게 관련 논문이나 연구 결과를 보여주고, 또 학생들이 직접 조사하고 서로 토론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검증이 안 된 이야기를 무작정 믿는 게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그 안에서 문제점을 찾게 하는 것이다. 요즘 한·중 관계를 위해 노력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다. 중국 사람들의 한국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싶다며 중국 교환학생을 신청하는 한국 학생도 있고, 한국에 대해 부정적으로 얘기하는 부모님과 싸우는 중국 학생도 있다. 직접 한국에 와보고 중국에 가보면 원래 알고 있던 사실과 현실이 다르다는 걸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나라 간의 교류와 교육이 중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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