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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 겨울, 오전 6시 남산…'1억 짜리 가방 3개' 미스터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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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남산자유센터는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이다. 주차장과 맞닿은 면에 위로 구부러진 처마 모양의 콘크리트 지붕이 특징적이다. 군사정부 초기에 결성된 아세아 반공연맹을 위한 본관으로 설계됐다. 이후 한국반공연맹 청사 및 국토통일원 부설연구소 등의 관련 단체들이 사용하고 있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이 건물 옆에 따로 지어진 웨딩홀로 더 알려져있다. 사진 김수근 문화재단.

구 남산자유센터는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이다. 주차장과 맞닿은 면에 위로 구부러진 처마 모양의 콘크리트 지붕이 특징적이다. 군사정부 초기에 결성된 아세아 반공연맹을 위한 본관으로 설계됐다. 이후 한국반공연맹 청사 및 국토통일원 부설연구소 등의 관련 단체들이 사용하고 있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이 건물 옆에 따로 지어진 웨딩홀로 더 알려져있다. 사진 김수근 문화재단.

2008년 2월 중순, 오전 6시. 새벽 어스름 속 서울 중구 남산자유센터 주차장. 가방 3개가 한 차량에서 다른 차량으로 조용히 옮겨졌다. 가방마다 1억씩, 총 3억이 들어있었다.

가방을 건넨 사람은 이백순(71) 당시 신한지주 부사장이다. 박중헌 당시 신한은행 비서실장과 송왕섭 비서실 부실장을 대동했다. 가방에 담은 건 이 부사장이 한 달 전부터 박 실장에게 당부해 마련한 돈이었다. 가방을 넘겨받은 차량은 조용히 주차장을 떠났다.

 아직까지도 재판이 계속되고 있는 이른바 ‘신한은행 사태’의 첫 장면이다. 2010년 신한은행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시작된 소송전은 15년째 이어지고 있지만, 이 첫 장면에서 가방을 넘겨받은 사람이 누구인지, 이 돈이 왜 갔는지는 지금도 미스터리다.

신한은행 싸움 15년… 라응찬vs신상훈

7일 서울 여의도 KBS홀에서 열린 '이희건 탄생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라응찬 전 신한금융지주 회장(왼쪽)과 신상훈 전 사장(오른쪽)이 웃으며 행사에 참석한 주주들에게 같이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 신한금융그룹

7일 서울 여의도 KBS홀에서 열린 '이희건 탄생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라응찬 전 신한금융지주 회장(왼쪽)과 신상훈 전 사장(오른쪽)이 웃으며 행사에 참석한 주주들에게 같이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 신한금융그룹

신한은행 15년 전쟁은 2010년 신한은행이 9대(2003~2009) 신상훈(75) 전 신한은행장(당시 신한금융지주 사장)을 횡령‧배임 등으로 검찰에 고소하며 시작됐다. 사실상 당시 라응찬(85) 신한금융지주 회장과의 분쟁으로,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신한은행 내분 사태’로 불린다.

신한은행 창업주인 故 이희건 명예회장과 경영자문계약을 체결한 것처럼 가장해, 이 명예회장의 명의로 된 통장으로 지급되는 돈을 빼돌려 썼다는 게 신 전 사장의 주요 혐의였다. ‘남산 3억원’을 급히 만들면서 평소 친분이 있던 고객에게서 돈을 빌려 썼고, 이 명예회장의 경영자문비 통장을 이용해 이 중 2억 6100만원을 갚았다는 것이다.

배임, 금융지주회사법 위반, 은행법 위반 등 여러 혐의를 합쳐 1심에서는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2심 재판부는 이 명예회장과의 경영자문계약이 정상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금융지주회사법 위반도 아니라고 판단해 형량을 벌금 2000만원으로 줄였다. 이 판결은 2017년에야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이 사건의 기소 검사는 이원석 현 검찰총장이었다.

2008년 2월 MB 당선 일주일 전… ‘3억원 SD에게 갔다’?

2012년 저축은행에서 뇌물을 받은 혐의로 대검찰청에 소환된 이상득 전 새누리당 의원. 중앙포토

2012년 저축은행에서 뇌물을 받은 혐의로 대검찰청에 소환된 이상득 전 새누리당 의원. 중앙포토

신한은행 싸움은 은행 안에서 끝나지 않았다. 행방이 묘연한 ‘남산 3억원’이 정치권으로 갔다는 의혹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MB 당선축하금으로 이상득 전 의원에게 전달됐다’는 의혹이다. 이상득 전 의원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형이고,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7년 12월 19일 제 17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돼 2008년 2월 25일 취임했다.

이 의혹은 ‘남산 3억원’ 현장에 있었던 박중헌 전 실장이 2012년 “이백순 당시 신한지주 부사장이 ‘라응찬 회장 지시니 3억원을 만들라’고 지시했고, 시간이 흐른 뒤 2010년 다른 고위 간부로부터 ‘그 돈은 SD에게 갔다, SD는 대통령 형 이상득 의원이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밝히면서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남산에서 운전기사를 직접 본 유일한 사람인 이백순 전 부사장은 ‘3억원 존재 자체가 날조’라고 주장하며 당시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2012년 이상득 전 의원의 저축은행 뇌물 사건을 수사하고 있던 검찰은 신한은행과 관련해 불거진 의혹 등 대선자금 수사로 뻗어나가진 않았다.

 라 전 회장의 이름은 2010년 본격적으로 신한은행 사태가 불거지기 전에도 정치권과 엮여 등장한 적이 있다. 2008년 12월 대검 중수부가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정관계 로비 사건(소위 ‘박연차 게이트’)을 수사하던 중, 라응찬 전 회장이 박연차 전 회장에게 50억원을 보낸 사실이 밝혀져 한 차례 논란이 됐다. 다만 이 사건에 대한 수사는 2009년 5월 박연차 게이트로 조사를 받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며 종결됐다.

재수사에도 ‘혐의없음’ 라응찬, 신상훈·이백순만 ‘위증’ 기소… 2심 무죄

 ‘남산 3억원’과 관련된 최초 수사에서 신상훈 전 사장이 “라응찬 전 회장 지시였다”고 주장했지만 ‘혐의없음’ 처분을 받았던 라 전 회장의 이름은 이후 여러 차례 재소환된다. 2013년 경제개혁연대의 고발로 검찰이 라응찬 전 회장과 이상득 전 의원의 정치자금법위반 혐의를 재차 수사했지만 역시 ‘혐의없음’으로 종결됐다. 2018년 검찰 과거사위원회가 ‘라응찬 전 회장, 위성호 전 은행장 등 신한은행 임직원들의 조직적 위증 의혹이 있다’며 권고해 이뤄진 재수사에서도 라 전 회장과 위 전 행장은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오히려 라 전 회장이 아닌, 신상훈 전 사장과 이백순 전 부사장만 위증 혐의로 기소됐다. 그러나 서울고등법원은 지난 25일 “공범 관계의 피고인이 증인이 될 경우, 증인의 증언의무보다 피고인의 진술거부권이 더 우선한다”며 “자신의 범죄사실에 관해 허위의 진술을 하더라도, 자신의 방어권 범위 내의 진술이라면 위증으로 처벌해서는 안된다”고 밝히며 두 사람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신상훈, 이백순 두 전 신한은행장들이 신한은행과 얽힌 소송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이 전 부사장은 이사회 결의로 자신의 성과급을 취소한 게 부당하다며 신한은행과 신한금융지주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냈지만 항소심까지 패소한 뒤 확정됐다. 신 전 사장은 “라응찬 라인이 나를 무고한 탓에 대표이사직을 내려놨는데, 6년 근무했다면 받았을 약 145억원과 명예훼손에 대한 위자료 10억원을 달라”며 신한은행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냈으나 1심에선 기각됐고, 7월 18일 항소심 조정 기일이 예정돼 있다. 다음달 9일에는 2019년 신상훈·이백순 전 은행장들과 함께 위증으로 기소된 직원들의 항소심 선고도 있다.

2019년 재수사를 마친 검찰은 ‘남산에서 3억이 전달된 사실은 있지만 누구에게 갔는지 실체 파악에는 한계가 있다’고 밝혔다. 남산 주차장의 진실은 간 돈도 있고, 돈 준 사람도 있는데 돈 받은 사람만 없는 채 미궁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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