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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로 택시 유턴, 도피 대신 연대로 기억의 전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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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1호 26면

오동진의 시네마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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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나라들이 학살의 기억을 갖고 있다. 그건 대체로 저개발과 식민의 기억에서 유래된 후 지금에 이르러 어떤 곳에서는 연대의 기억으로, 또 어떤 곳에서는 진영 간 갈등의 기억으로 작동한다. ‘벌써 잊었어?’라고 하거나 ‘아직도 그 얘기야?’ 하는 식이다. 그런 점에서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고 현재진행형이다.

악을 쫓다가 스스로 악마로 변해

조코 위도도 대통령의 등장 이후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역시 엄청난 희생이 따랐던 나라이다. 수하르토 집권기가 그랬다. 그는 1965년 쿠데타로 집권한 후 수도 자카르타가 있는 자바 섬에서만 100만 명의 공산주의 혹은 공산주의자로 간주된 자, 지식인, 그리고 중국인을 학살했다. 수하르토는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를 독립시킨 건국의 아버지 수카르노 정권을 쓰러뜨렸는데, 수카르노가 친중 노선이고 공산주의 이념에 친화적이라는 이유를 내세웠다. 사실은 군부 내 좌익 세력이 우익 장군 7명을 처단하려는 과정에서 수하르토는 간신히 살아남았고 그 보복으로 일종의 역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이후 나라 전체를 학살로 몰고 갔다.

그 끔찍한 기억은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촉망받는 여성감독 카밀라 안디니의 2022년 영화 ‘나나’에 고스란히, 그러나 매우 서정적인 시각과 미감으로 담겨졌다. 영화에서 주인공 나나(해피 살마)는 늘 악몽을 꾸는데, 자신은 어디론가 도망을 가고 있고 뒤에서 따라 오던 아버지가 수상쩍은 청년 몇 명에게 칼로 목이 잘려 나간다는 내용이다. 사람들은 나나의 꿈속에서든 현실 속에서든 숨죽여 속삭인다. 이웃집 아낙은 마을 사람들에게 얘기할 때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한다. “아, 글쎄 그 남자가 공산당이었대요.” 나나는 언니한테 물어본다. “네덜란드 사람들이 우리를 쫓아오는 거야?” 식민 지배를 막 벗어난 이들에게는 여전히 네덜란드 군대가 공포의 대명사였던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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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학살을 직접적으로 다룬 다큐드라마는 미국 감독 조슈아 오펜하이머의 ‘액트 오브 킬링’이다. 이 영화가 주목받았던 것은 100만 학살의 선봉대장 역할을 했던 ‘안와르 콩고’라는 이름의 군부 인사를 추적 인터뷰했기 때문인데 그 방식이 놀라웠다. 안와르에게 그들의 ‘위대한 살인의 업적’을 영화로 만든다는 제안을 했고, 가해자들은 좋아라하며 응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 과정을 낱낱이 담아낸다. 안와르는 자신이 공산주의자(들이라 불리었던 사람들)의 목을 따고 내장을 꺼내고 몸을 가른 잔혹한 행위들이 다 나라를 위해서였다고 자부한다. ‘액트 오브 킬링’을 보고 있으면 그래서, 서늘해지기 보다는 코믹해진다. 처연해지고 슬퍼진다. 인간의 죄의식은 단순한 수사학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안와르는 단죄되지 않고 천수를 누렸다.

우리에게도 아픈 기억이 있다. 그 규모가 비교할 수 있는 것이든 아니든, 5·18의 아픔은 지구상의 다른 시공간에서 일어났던 학살의 기억과 겹쳐진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기록한 이창동 감독의 1999년 영화 ‘박하사탕’이 위대한 것은 가해자의 시선으로 5·18을 그렸다는 ‘따위’가 아니다. 그의 영화는 학살(자)의 내면, 그 악마성의 심연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걸작의 반열에 올라 있다. 광주에서 계엄군으로 투입됐던 주인공 영호(설경구)는 그것이 오발이었든 아니면 알고도 발사했던 것이든 여고생을 사살했다. 그 트라우마와 콤플렉스가 오히려 자신을 공안과 형사가 되게 했고 운동권 학생을 ‘때려잡는 일’에 앞장서게 만들었다. 형사를 그만 둔 뒤에는 작은 중소기업을 운영하며 아무런 일 없이 살아가는 척 하지만 아내의 외도와 사업 실패로 점점 더 막장의 인생이 되어 간다. 그는 자신 안에 있었던 악의 심연을 깨닫게 된다.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쫓다가 스스로 악마가 됐던, 그 역할에 앞장섰던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건 실로 끔찍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영호는 가리봉동 ‘공돌이’ 청년 시절, 자신의 첫사랑 순임(문소리)과 소풍을 갔던 진소마을(충청북도 제천시 백운면 애련로 10길 153-4)의 철로까지 흘러간다. 그는 오랜만에 만나는 예전 친구들과의 야유회에서 술이 취해 난동을 부리고, 결국 철길 위에까지 기어 올라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나 다시 돌아갈래!”

학살의 기억을 내면화시켜 그 심연의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나온 사람들의 새 역사는 어쩔 수 없이 진화하고 진보한다. 돌아가지 못한다. 한국사회가 어쩌면 여기까지 온 것은 ‘박하사탕’이라는 걸출한 영화적 연대기를 같이 보고 공유했기 때문일 수 있다. ‘박하사탕’으로 한국의 현대사는 새로운 분기점을 통과하게 됐다.

사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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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 감독이 만든 2017년도 영화 ‘택시 운전사’는 영화적 완성도 면에서 평가가 다소 엇갈리긴 하지만 수작으로 꼽힌다. 이른바 ‘광주 비디오’를 찍어 해외로 유출했고, 그래서 학살의 진실을 세상에 알린 도쿄 주재 독일 특파원 위르겐 힌츠페터(토마스 크레취만)의 얘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힌츠페터를 광주 현장으로 실어 나르고 그 죽음의 현장에서 그를 빼내 왔던 택시 기사 김사복(극중 이름은 김만섭, 송강호)의 얘기를 그리고 있다. 이 영화에 대해 평가가 다소 엇갈린다고 했던 것은 극 후반 김만섭의 탈출 과정 때문이다. 일군의 택시 운전사들(유해진 등)이 자신들의 택시를 동원해 무장 군인들의 추적을 막아서는 스펙터클 씬이 오히려 사실을 지나치게 윤색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모든 영화에는 윤색의 윤리학이라는 것이 있으며 ‘택시 운전사’는 그 부분에서 약간 선을 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택시 운전사’는 몇몇 빼어난 감동의 장면들을 선보인다. 하워드 혹스 감독의 얘기대로 좋은 영화란 좋은 장면 세 개쯤 있는 것을 말한다면 ‘택시 운전사’는 세 개가 훨씬 넘기에 충분히 좋은 영화다. 예컨대 택시 기사 김만섭이 힌츠페터를 버리고 혼자서 광주를 벗어나 순천의 국밥집에 들러 밥을 먹는 장면 같은 것이다. 그가 묵묵히 숨죽여 밥을 입에 떠 넣고 있을 때 옆에서 밥집 여주인과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광주에서 폭도들이 사람을 죽인대.” 그러자 김만섭은 입에 밥알을 넣은 채 중얼거린다. “그게 아닌데. 폭도들이 그러는 게 아닌데.” 김만섭의 중얼중얼은 차츰 감정의 에스컬레이터를 탄다.

양심과 행동 되돌린 역사 있어

씨네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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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한국을 넘어 세계에서, 중얼대는 연기의 최고봉은 송강호를 따라 잡을 자가 없다. 입술을 내민 채 눈을 내리깔고 이런저런 불만과 자기 목소리를 중얼 중얼대는 모습은 영락없이 소심한 소시민의 모습을 닮았고 송강호는 그런 연기의 1인자다. ‘택시 운전사’에서 가장 백미는 그렇게 힌츠페터를 버리고 서울로 달리던 김만섭의 택시가 어느 지점에서 U턴을 하는 장면이다. 택시 기사는 스스로에게, 세상을 향해 욕을 해대며, 자기만 살겠다면 내가 지금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는 식으로 울먹이면서 차를 돌린다.  영화는 그 즈음에서 모두를 울먹이게 만든다. 우리 모두 그때 그렇게, 김만섭이 차를 돌리듯, 우리의 양심과 행동을 U턴한 역사가 있다. 우리는 더 이상 도망가지 않고 맞선 적이 있다.

오래된 얘기 같지만 캄보디아의 170만 학살극 ‘킬링 필드’는 불과 50년이 안된 얘기다. 나의 아버지, 어머니가 겪었던 얘기이다. 당연히 그 상처는 아직 아물지 못했다. 킬링 필드에 대한 얘기는 1985년 롤랑 조페 감독(영화 ‘미션’ ‘시티 오브 조이’의 감독)이 만든 ‘킬링 필드’가 있다. 샘 워터스톤이 뉴욕타임즈 특파원인 시드니 샌버그 기자로 나온다. 그는 자신의 통역을 맡았던 캄보디아인 디스 프랜(행 응고르)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애쓴다. 인간주의는 매우 훌륭했지만 아쉽게도 오리엔탈리즘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한 영화였다.

양민들을 학살했던 크메르 루즈의 폴 포트는 1979년 실각했지만 1997년까지 살았다. 학살자들은 대개 오래 산다. 칠레의 피노체트도 그랬다. 피노체트의 잔혹사는 1976년 만들어진 헬비오 소토 감독의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에서 낱낱이 그려진다.

킬링 필드의 비극은 아직 완벽하게 정리되지 못했다. 거기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여인이 프랑스까지 넘어가 아이를 키웠다. 그 아이가 드니 도라는 캄보디아계 프랑스 감독이고, 그는 2018년 애니메이션 ‘1975 킬링 필드 : 푸난’을 만들었다. 캄보디아 학살의 역사도 서서히 공유와 연대의 역사로 바뀌어 가고 있는 중이라는 얘기다. 그게 중요하다. 정치·군사적 외교는 역사적 성찰과 연대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그런 법이다. 늘.

오동진 영화평론가 ohdjin11@naver.com 연합뉴스·YTN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이후 영화주간지 ‘FILM2.0’ 창간, ‘씨네버스’ 편집장을 역임했다.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컨텐츠필름마켓 위원장을 지냈다. 『사랑은 혁명처럼 혁명은 영화처럼』 등 평론서와  에세이 『영화, 그곳에 가고 싶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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