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21세기 술탄’ 장기 집권이냐, 20년 만의 정권 교체냐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841호 11면

28일 튀르키예 대선 결선투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이 지난 21일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열린 대선 캠페인에서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이 지난 21일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열린 대선 캠페인에서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이 28일 치러질 대선 결선투표에서 권좌를 5년 더 지킬 수 있을까. 아니면 ‘21세기 술탄’으로 불려온 에르도안 대통령의 20년 권력이 마침내 막을 내리고 정권 교체가 이뤄질까.

에르도안 대통령은 지난 14일 대선 1차 투표에서 49.52% 지지율로 과반 득표에 실패하며 28일 결선투표를 치르게 됐다. 상대는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공화인민당(CHP) 대표. 그는 1차 투표에서 에르도안 대통령보다 약 250만 표가 적은 44.88%를 득표하며 2위 차지했다. 판세는 예측불허다. BBC와 알자지라 등도 1차 투표에서 3위를 차지한 시난 오안 후보가 에르도안 대통령 지지를 선언했지만 오안 후보를 지지했던 유권자들이 결선투표에서 얼마나 에르도안 대통령을 지지할지는 여전히 미지수라고 전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2003년 3월 의원내각제 시절 총리를 지낸 것을 시작으로 2014년 8월부터 현재까지 대통령으로 재직하며 20년째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2017년 대통령 중심제 개헌 이후 2018년 재선에 성공했다. 당시 개헌으로 대통령은 5년 임기를 두 차례만 할 수 있게 됐지만 에르도안 대통령은 ‘개헌 이후만 해당 임기로 친다’는 최고선거관리위원회 유권해석에 따라 이번에도 대선 출마가 가능해졌다.

이번 선거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는 이슬람주의를 바탕으로 막강한 권력을 유지해 온 에르도안 대통령이 앞으로도 5년간 더 권좌를 지킬 수 있을지, 아니면 케말주의로 불리는 세속주의자로서 경제 관료 출신인 클르츠다로을루 후보가 막판 역전극을 이뤄낼 수 있을지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과거 이슬람을 바탕으로 중동·북아프리카·발칸반도와 흑해 연안을 아울렀던 오스만튀르크 제국(1299~1922) 시절의 영광을 되살리겠다는 기치 아래 민족주의와 이슬람주의를 강조해 왔다. 이에 따라 국내에선 소수 민족인 쿠르드족을 억압하는 튀르키예 민족주의를 강조했고 대외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대신 권위주의를 앞세웠다.

정권 교체 여부가 더욱 관심을 끄는 것은 선거 결과에 따라 에르도안 대통령의 ‘등거리 외교 노선’이 바뀔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튀르키예는 엄연히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이다. 그럼에도 에르도안 대통령은 공공연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가까이 지내며 우크라이나 전쟁 와중에도 서방과 러시아의 ‘중재자’ 역할을 자처해 왔다.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공화인민당 대표가 지난 18일 튀르키예 앙카라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두 대선후보는 지난 14일 튀르키예 대선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나오지 않아 28일 결선투표에서 최종 승자를 가리게 된다. [연합뉴스]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공화인민당 대표가 지난 18일 튀르키예 앙카라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두 대선후보는 지난 14일 튀르키예 대선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나오지 않아 28일 결선투표에서 최종 승자를 가리게 된다. [연합뉴스]

영국의 싱크탱크인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에 따르면 튀르키예 인구는 8500만 명으로 나토 회원국 중 미국 다음으로 많다. 병력도 35만 명이나 되고 전차 2300여 대, 장갑차 5200여 대, 야포 7800여 문, 전투기 316대, 호위함 16척 등 막강한 재래식 전력도 보유하고 있다. 더욱 중요한 건 나토의 핵 정책에 따라 벨기에·독일·이탈리아·네덜란드와 함께 20기의 미국 핵무기까지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같은 국제정치 현실에도 불구하고 에르도안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며 서방국가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이번 대선에 러시아는 물론 서방 주요 국가들이 시선이 집중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튀르키예는 지난해 핀란드와 스웨덴이 나토 가입을 신청하자 쿠르드족 활동가에게 유화적이란 이유로 가입을 막아 왔으며 지난 3월엔 핀란드의 가입만 선별적으로 찬성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과반 득표에 실패한 뒤 결선투표까지 치르게 된 게 에르도안 대통령에겐 정치적 위기로 작용하고 있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1차 투표에서 에드로안 대통령은 농촌·서민층·이슬람주의자 사이에서 강세를 보였다. 반면 도시·중산층과 서구적 지식층, 쿠르드족 밀집 지역에선 클르츠다로을루 후보의 강세가 두드러졌다. 튀르키예가 에르도안 대통령의 이슬람주의와 클르츠다로을루 후보가 대변하는 세속주의로 깊게 분열돼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다. 지난 2월 5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동남부 대지진 발생 지역도 1차 투표에서 클르츠다로을루 후보의 손을 들어줬다. 이 지역은 쿠르드족 밀집 지역과 상당 부분 겹친다.

에르도안은 대선 승리를 위해 현역 프리미엄을 총동원해 왔다. 이와 관련, BBC는 대선 선거전이 한창이던 지난 4월 튀르키예 국영방송이 에르도안 뉴스를 32시간42분간 보도한 데 비해 경쟁자인 클르츠다로을루 후보의 동정은 불과 32분만 다뤘다고 지적했다. 도시 곳곳의 대형 건물 벽면도 에르도안 대통령 사진과 함께 ‘도루 아담(진실된 인물)’이라고 적힌 거대한 선거 벽보가 선점하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선거 날짜도 임의로 조정했다. 원래 6월 18일로 예정됐지만 대학 시험, 메카 순례, 여름 휴가 등을 이유로 한 달 가까이 앞당겼다.

포퓰리즘 공약도 쏟아내고 있다. 에너지 가격 등 치솟는 물가에 유권자들의 불만이 커지자 한 달간 가정용 가스를 무상 공급한다는 선심 공약도 내놨다. 학생들에겐 인터넷 데이터 무료 제공도 약속했다. 튀르키예는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며 심각한 실업난과 고물가에 시달려 왔다. 지난해 10월 물가 상승률이 최고 85.5%에 이를 정도였다. 이럴 경우 통상 금리를 올려 통화량을 조절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에르도안 대통령은 오히려 소비를 촉진해 경제를 살린다며 금리를 내리고 최저임금도 50% 인상했다 그 결과는 리라화 가치 폭락으로 이어졌다. 경제 전문가인 클르츠다로을루 후보와의 결선투표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이유다.

서방국가들 사이에서는 설령 에르도안 대통령이 결선투표에서 승리하더라도 예전처럼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긴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적잖다. 이번 선거를 통해 공화국 건국의 아버지인 케말 파샤의 정신을 잇는 케말주의·세속주의 세력의 건재함과 인플레에 시달리는 국민의 반대 목소리가 확인됐기 때문이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에르도안 대통령도 결선투표를 앞두고 1차 투표 때와는 사뭇 다른 선거 전략을 들고 나왔다. 케말주의자와 세속주의자를 자극하는 선거 구호도 자취를 감췄고 세를 과시하는 지지자들의 대규모 행진도 중단했다. 자신에게 비우호적인 세속주의자들이 투표장으로 달려갈 명분을 주지 않으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대신 지진 피해 지역을 방문하는 등 ‘부드럽고 자애로운 지도자’ 이미지를 부각하는 데 주력하는 모습이다.

반면 그동안 학자 분위기에 대중 연설도 조용히 하는 등 유화적 이미지로 파워가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아온 클르츠다로을루 후보는 결선투표를 앞두고 에르도안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한층 강화하고 나섰다. 1차 투표 전 여론조사에서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앞서고도 정작 투표에선 밀렸던 클르츠다로을루 후보 입장에선 지지자들을 최대한 투표장으로 이끌어야 승리를 거머쥘 수 있는 상황이다. 2023년 튀르키예 대선이란 공은 이제 유권자들의 손에 넘어갔다.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tzschaeit@gmail.com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