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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쿠리' 항의에 "쟤 날려버려"…이랬던 선관위 초유의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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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총장이 23일 오전 북한의 해킹 시도와 사무총장 자녀 특혜 채용 의혹과 관련해 경기도 과천 중앙선관위를 항의 방문한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여당 간사 이만희 의원과 면담하고 있다.

박찬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총장이 23일 오전 북한의 해킹 시도와 사무총장 자녀 특혜 채용 의혹과 관련해 경기도 과천 중앙선관위를 항의 방문한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여당 간사 이만희 의원과 면담하고 있다.

 1963년 창설돼 올해로 창립 60주년을 맞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위원장 노태악 대법관)가 역대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 자녀특혜채용과 해킹논란으로 사무총장·사무차장이 동시에 자진 사퇴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면서다.

강민국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26일 “‘꼬리 자르기 사퇴’로 국민 분노를 잠재울 수 없다”며 “노태악 선관위원장의 사퇴로 환골탈태의 시작을 알려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사실 ‘견제’와 ‘균형’은 민주주의의 중요한 원칙이지만, 그동안 선관위는 독립성을 방패막이로 내세우며 사실상 무소불위 권력을 누린 채 견제받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전날 박찬진 사무총장, 송봉섭 사무차장의 자진 사퇴만으로는 조직 전체의 개혁이 불가능하다는 취지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국민의힘 간사인 이만희 의원도 이날 원내대책회의에서 “선관위 고위직 자녀들에 대해 임용부터 승진까지 챙기는 ‘원스톱 서비스’가 제공된 의혹이 있다”며 “지금까지 드러난 6건의 고위직 자녀 임용 사례를 살펴보면, 임용 후 승진까지 한 사례가 6건 중 5건으로 파악된다”고 밝혔다.

이 의원에 따르면 2022년 광주 남구 9급 공무원에서 전남 강진군 선관위 경력직으로 채용된 박 총장의 자녀는 6개월 만에 8급으로 승진했다. 2018년 충남 보령시 8급 공무원에서 충북 선관위로 옮긴 송 차장의 자녀는 1년 3개월 만에 7급으로 승진했다. 단순히 채용만 된 것이 아니라 ‘아빠 찬스’를 활용해 고속 승진까지 했다는 지적이다. 이 의원은 “전문적이고 객관성이 보장되는 감사원 등의 외부 감사를 수용하는 게 국민 눈높이에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이만희 국민의힘 의원(왼쪽)을 비롯한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23일 오전 경기 과천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항의 방문하고 있다. 뉴스1

이만희 국민의힘 의원(왼쪽)을 비롯한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23일 오전 경기 과천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항의 방문하고 있다. 뉴스1

이같은 여권의 전방위 압박은 헌법 기관인 선관위가 독립성을 방패 삼아 외부감시를 받지 않으면서 자정능력을 잃은데다가, 정치적 중립 의무도 지키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선관위는 헌법 114조 ‘선거와 국민투표의 공정한 관리 및 정당에 관한 사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선관위를 둔다’는 조항을 근거로 설치됐는데 ‘헌법적 독립기구’라는 명목으로 외부간섭을 회피해왔다. 조진만 덕성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1960년 벌어진 3·15부정선거의 여파로 1962년 개헌 당시 선관위는 내무부(현 행정안전부) 소속에서 헌법적 독립기관으로 승격됐다”며 “하지만 독립성을 지나치게 내세우다 보니 입법부·사법부·행정부의 견제를 받지 않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2022년 3월 대선 사전투표 당시 벌어진 ‘소쿠리 투표’ 논란에도 선관위는 “선관위는 헌법상 독립기구로 감사원의 직무감찰 대상이 아니다”며 감사원 감사를 거부했다. 2020년 국회 국정감사에는 선관위 사무총장·사무차장 등이 심야시간·주말·공휴일에 업무추진비를 총액의 3분의 1가량 써 지침위반이란 지적을 받았다. 행안위 관계자는 “당시도 헌법적 독립기구라는 명목으로 자료제출을 한동안 거부했다”고 말했다.

반면에 권한은 막강하다. 선관위는 ▶범죄혐의 장소 출입권 ▶자료제출 요구권 ▶동행 또는 출석 요구권 ▶증거물품 수거권 ▶현장 조치권 등 수사기관에 준하는 권한을 갖고 있다. 만약 이에 응하지 않으면 처벌 혹은 고발 조치를 받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자료제출요구에 응하지 않거나 허위자료를 제출하면 1년 이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는 식이다.

선관위원 구성도 편향됐다는 지적이 많다. 선관위원장은 관례상 대법관이 맡는데 정치 성향에 따라 조직 분위기가 크게 갈린다는 평가가 나온다. 진보 성향인 노태악 위원장은 2022년 문재인 정부 시절 김명수 대법원장이 지명했다. 현재 나머지 위원 8명 중 단 2명(남래진·조병현 위원)만이 국민의힘이 추천한 인사다. 나머지 6명은 문재인 전 대통령(김필곤 상임위원, 이승택·정은숙 위원), 김 대법원장(김창보·박순영 위원)이 지명하거나 더불어민주당(조성대 위원)이 추천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2019년 1월24일 오후 청와대에서 조해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후 이동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전 대통령이 2019년 1월24일 오후 청와대에서 조해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후 이동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이들의 정치적 성향도 문제다.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소장 출신인 조성대 위원은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 박원순 전 시장을 지지하며 “만세”라고 했다. 문재인 대선 캠프 특보 출신인 조해주 전 상임위원은 3년 임기를 마친 지난해 1월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서 비상임위원으로 재임명됐다가 논란 끝에 사의를 표하기도 했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현재 선관위원 구성에도 문제가 많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문재인 정부 시절에 국민의힘은 선관위가 선거 관리를 편파적으로 한다는 불만을 여러번 제기했다.

그렇다고 선거 관련 시스템이 안정적인 것도 아니다. 선관위에 따르면 지난 5년간 선관위에 대한 사이버 공격 시도는 2020년 2만5187건, 2021년 3만1887건, 2022년 3만9896건으로 증가하고 있다. 선관위 해킹은 자칫 선거인 명부 유출이나 투개표 조작, 선거 시스템 마비로 이어질 수 있다. 선관위는 국정원의 보안점검 권고에도 ‘헌법상 독립기관’인 점을 내세워 “자체 점검하겠다”고 버티다가 비판 여론이 비등해지자 “국가정보원과 한국인터넷진흥원(KISA)의 합동 점검을 받겠다”고 입장을 번복했다.

지난 대선 당시 확진·격리자 투표용지를 플라스틱 소쿠리에 모아놓은 모습. 사진 인스타그램

지난 대선 당시 확진·격리자 투표용지를 플라스틱 소쿠리에 모아놓은 모습. 사진 인스타그램

현재 선관위는 특혜채용 관련한 자체 특별감사와 전수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인적쇄신을 하고 특혜채용의 창구도 막겠다는 계획이다. 선관위 관계자는 “사무총장을 외부에서 영입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며 “공고 없이도 채용이 진행되는 ‘벽오지 채용’을 없애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제 살 깎기’식이어서 큰 폭의 개혁을 기대하긴 힘들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선관위는 ‘소쿠리 투표’ 논란 이후 ‘선거 관리 역량 강화를 위한 조직개편안’을 발표했지만 일부 조직을 개편하는 수준에 그쳤다.

행안위 소속 국민의힘 의원은 “‘소쿠리 투표’ 논란 당시 선관위를 항의 방문했을 때 일부 직원이 뒤에서 ‘쟤 누구냐. 날려버리자’는 말까지 하더라”며 “감사원 감사를 명문화하는 등 외부 감독 체계를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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