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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서사’ 된 장진호 전투, 과거엔 어땠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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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개봉한 중국 영화 '장진호'의 한 장면. 중국 인민지원군 9군단이 북한으로 건너가기 위해 집결하고 있다. 사진 시나망 캡처

2021년 개봉한 중국 영화 '장진호'의 한 장면. 중국 인민지원군 9군단이 북한으로 건너가기 위해 집결하고 있다. 사진 시나망 캡처

지난달 미국을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의회 연설에서 미·중 과거사에 남아있던 불씨에 기름 한 바가지를 부었다. 그는 “미 해병대 1사단은 장진호(長津湖) 전투에서 중공군 12만 명의 인해 전술을 돌파하는 기적 같은 성과를 거뒀다. 장진호 전투에서만 미군 4500명이 전사했고, 6·25 전쟁에서 미군 약 3만7000명이 전사했다”고 말했다.

장진호 전투는 6·25가 한창이던 1950년 11월 27일 한반도의 북쪽 끝으로 진격하던 미군과 이를 막기 위해 압록강을 넘어온 중공군이 처음으로 대규모로 맞붙은 전투다. 중공군은 미군보다 6~8배 많은 병력으로 미군을 에워싸고 포위섬멸전을 벌였고, 미군은 필사적으로 포위망을 뚫고 흥남으로 철수한 것이 전투의 결과다. 보름간 펼쳐진 이 전투로 미군이 대부분이었던 연합군은 전사 및 실종 5923명, 부상 4582명, 동상 등 비전투 손실 7338명을 기록했고 중공군은 동사 포함 사상자가 2만3000명이 넘는 등 5만~6만 명의 인명피해가 났다.

중국 정부는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마오닝(毛寧) 외교부 대변인은 “나는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의 위대한 승리가 중국과 세계에 중대하고 심원한 의의를 갖고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고 밝혔다. ‘항미원조’는 6·25의 중국식 표현이다. 미국에 맞서 북한을 도운 전쟁이란 뜻이다. 그는 또 “어떤 나라든, 어떤 군대든 역사 발전의 흐름과 반대편에 서서, 힘을 믿고 약자를 괴롭히고, 시대 흐름에 역행하고, 침략을 확장하면 반드시 머리가 깨지고, 피를 흘릴 것이라는 강철 같은 사실을 세상에 알린다”고 극언했다. 미국을 겨냥한 발언으로 중국 정부가 ‘항미원조 전쟁’에 대해 평가하는 의의이기도 하다.

장진호 전투는 시진핑(習近平) 정권 들어서 급팽창한 애국주의의 상징이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장진호〉는 중국 역대 박스오피스 1위 기록을 갈아치웠다. 영화관에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면 일부 관객들이 일어나 경례를 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장진호 띄우기와 더불어 중공군의 6·25 참전에 대한 정당성을 강화하기도 한다. 중국이 규정하는 항미원조 전쟁은 6·25 발발 후 자국이 참전한 1950년 10월부터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까지로 ‘미국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전쟁’이다. 중국은 북한의 남침을 인정하지 않고 ‘한반도에서 남북 쌍방 간에 발생한 내전’으로 규정한다. 또 반격에 나선 미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진한 것은 ‘침략’이자 중국 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며 참전을 정당화하고 있다.

과거엔 그다지 언급되지 않았던 항미원조 전쟁과 장진호 전투는 시진핑 집권기 들어 본격적으로 부각했다. 그러면서 갑론을박과 잡음도 적잖이 일고 있다. 최근 SNS엔 ‘란저우대학의 한 교수가 항미원조 전쟁에 대해 중국이 일득구실(一得九失·하나를 얻고 9개를 잃음)했다며 모독했다’고 주장하는 영상이 올라왔다. 곧바로 교수와 대학에 대한 비난이 쇄도했다. 란저우대는 “사안을 고도로 중시해 실무팀을 꾸려 검증 작업을 실시했다”며 “뒷부분을 자른 채 편집해 마치 해당 교수가 말한 것처럼 호도됐다”고 해명했다.

2021년엔 경제지 ‘차이징(財經)’의 부편집장 출신 언론인 뤄창핑(羅昌平)이 SNS에 “반세기가 지났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전쟁이 정의로웠는지에 대해 거의 반성하지 않았다. 마치 당시의 모래조각(沙雕·바보라는 의미) 부대가 상부의 ‘영웅적인 결정’을 의심하지 못한 것과 같다”고 했다. 곧바로 참전 군인들을 모독했다며 당국에 신고가 접수됐고 그는 2018년 제정된 ‘영웅열사보호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영화 〈장진호〉에 대해서도 일부 네티즌들은 “이 전쟁에 관해 많은 평가를 할 필요가 없다. 현재의 북한과 한국을 보면 답은 분명해진다”는 한 네티즌의 글을 퍼나르기도 했다.

그렇다면 시진핑 이전 과거 장진호 전투에 대한 평가는 어땠을까. ‘중공 10대 원수’ 중 한 명으로 유명한 류보청(劉伯承·1892~1986) 전 중앙군사위 부주석은 “하나의 병단(兵團·당시 12만명 규모)이 1개 사단을 포위해서, 거대한 대가를 치른 후에도 적을 섬멸하지 못하고, 적을 궤멸시키지도 못했다. 적은 편제를 갖춰 전투에서 철수했고, 모든 장비와 부상병까지 데려갔다”고 평했다. 전투의 책임자였던 쑹스룬(宋時輪) 제9 병단 사령관도 당시 장진호 전투를 포함한 동부전선 작전이 성공적이지 못했다며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은 쑹스룬 등 야전 지휘관들에게 직접 전보를 보내 세부 작전에 구체적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그런데 결과가 신통치 못했던 것이다. 제9 병단은 이 전투로 입은 손실 때문에 3개월 동안 후방으로 철수해 부대를 재편성해야 했다. 이런 이유들로 그간 장진호 전투는 ‘영웅적인 승리’라는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연합군도 장진호 전투의 결과로 북진을 포기했고 서울을 내주며 북위 37도까지 후퇴했다. 6·25와 장진호 전투는 고조되는 미·중 전략 경쟁 속에서 기 싸움의 소재로 계속 활용될 듯하다.

이충형 차이나랩 특임기자(중국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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