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금가루 뿌린 볶음밥, ‘양저우 차오판(揚州炒飯)’

중앙일보

입력

사진 셔터스톡

사진 셔터스톡

중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도 보편적으로 손쉽게, 또 흔하게 먹을 수 있는 중국 음식으로 무엇이 있을까?

그런 음식은 여럿이 있겠지만 우선은 계란 볶음밥을 빼놓을 수 없겠다. 웬만한 나라에 있는 대부분 중국 음식점 메뉴에는 계란 볶음밥이 공통으로 올라있기 때문이다. 계란 볶음밥이 왜 그렇게 널리 퍼졌을까?

이유는 가장 평범한 중국 음식인 동시에 역설적으로 매우 특별한 요리였기 때문인 것 같다. 얼핏 별것 없어 보이지만 역사적으로는 계란 볶음밥 만큼 대단한 음식도 찾아보기 쉽지 않다.

일단 별명에서 빛났던 과거 위상을 엿볼 수 있다. 옛날에는 계란 볶음밥을 쇄금반이라고 불렀다. 부술 쇄(碎), 금 금(金), 밥 반(飯)을 썼으니 말하자면 금가루 뿌린 밥이다. 기름에 코팅된 밥알에 계란노른자가 덧입혀져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마치 황금으로 지은 밥 같다고 해서 생긴 별칭이다.

한갓 계란 볶음밥을 놓고 이런 어마어마한 찬사를 한 사람은 7세기 초의 수나라 황제, 양광이라고 한다. 진시황에 이어 두 번째로 중원을 통일했고, 강북과 강남을 잇는 대운하를 건설했지만 고구려를 침략했다 멸망한 인물이다. 엄청난 권력에 걸맞게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던 것으로 유명한 수양제인데 왜 겨우 계란 볶음밥 하나 놓고 금가루 뿌린 밥 운운하며 호들갑을 떨었던 것일까?

서기 604년 권좌에 오른 수양제가 계란 볶음밥을 처음 맛본 것은 대운하를 완성한 후 수도인 장안, 지금의 산시 성 서안을 떠나 장쑤 성 일대로 순시여행을 떠났을 때다. 수양제가 강소성 양주(揚州)에 들렀을 때 수행했던 재상, 월국공 양소가 평소 자신이 즐겨 먹던 계란 볶음밥을 만들어 바쳤고 이를 먹어 본 수양제가 금을 부숴 밥을 지은 것 같다며 쇄금반이라고 요란을 떨었다는 것이다.

중국에는 푸젠 볶음밥(福建炒飯), 새우 볶음밥 등등 여러 종류와 형태의 볶음밥이 있다. 이런 다양한 볶음밥의 바탕이 되는 것이 계란 볶음밥이고 또 그 원조이자 대표로 꼽는 것이 양주 볶음밥, 중국어로 양저우 차오판(揚州炒飯)인데 그 유래가 여기서 비롯됐다고 한다.

여기서 잠시 팩트 체크를 해 보면 수양제의 계란 볶음밥 이야기는 사풍이 썼다는 요리서 『식경(食經』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한다. 사풍은 수양제의 요리책임자였다고 하는데 식경이라는 문헌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그 일부 내용만 다른 문헌을 통해 알려져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수양제와 계란 볶음밥, 쇄금반 스토리는 식경에 실려 있었다는 음식을 토대로 여러 스토리가 덧붙여져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야기의 사실 여부를 떠나 여기서 한 번쯤 생각해 볼 부분이 있다. 계란 볶음밥을 놓고 금가루 뿌린 밥 같다며 극찬한 것이 별다른 의미 없이 속된 말로 과장하기 좋아하는 말 습관 때문에 생겨난 것일까?

노랗게 빛나 볶음밥이 단지 맛있게 보여서 비유적으로 한 말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이런 별칭에서 그 이상의 역사적 의미도 찾을 수 있다.

일단 수양제가 계란 볶음밥을 먹었다는 시기는 7세기 초로 이때는 중국에서 아직 쌀이 널리 퍼지지 못했을 때다. 수나라 수도 대흥, 지금의 장안이나 동도로 불렸던 낙양은 당시 밀 농사 지역이었다. 물론 밀도 귀했지만 벼농사는 아직 강남 지역인 양자강(長江) 이남에서 강북으로 확대되지는 못했을 때다.

그렇기에 수양제나 월국공 같은 최고 권력자, 최상위 부유층도 쌀밥에 익숙하지 않았던 시대였고 하물며 밥을 볶는 기름과 계란 또한 귀했으니 평민의 눈에 계란 볶음밥은 금가루로 지은 밥처럼 보였을 것이다.

실제 계란 볶음밥이 문헌에서 확인되는 것도 이 무렵이다. 수양제보다 약 50년 앞선 6세기 중반에 발행된 『제민요술』로 이 책은 지금의 산둥 성인 북위(北魏)의 고양태수 가사협이 지은 농업서이자 요리책이다. 계란 볶음밥이 6세기 중반 7세기 초에 쌀의 고장 강남에서 밀과 잡곡의 고장 강북으로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계란 볶음밥을 먹었다는 인물이 하필 수양제인 것 역시 강북과 강남을 잇는 대운하를 처음 개통한 인물이었기에 이 시기에 쌀과 같은 곡물의 이동과 벼농사의 확대가 이뤄졌음을 암시하는 것일 수 있다.

현대 중국에서 양주는 우리의 전주비빔밥처럼 볶음밥의 대표 지역이며 유래지로 꼽는데 그 이유 또한 쇄금반 스토리에서 유추가 가능하다. 양주는 흔히 양자강으로 알려진 장강의 지류인 실제의 양자강이 흐르는 곳으로 수당시대 대운하를 통한 교통의 요지로 정치 경제의 중심지였다. 그런 만큼 맛있고 귀했던 계란 볶음밥도 이곳을 통해 퍼졌을 것이다.

한편 계란 볶음밥이 중국 밖 세상으로 퍼진 데는 청나라 때, 양주 태수를 지낸 이병수(伊秉綏)라는 사람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임기 후 고향인 푸젠성과 광둥 성에 양주 볶음밥을 전했고 이곳 출신 화교들이 해외로 퍼지면서 세계 각지 중국 음식점에서 빠지지 않는 메뉴가 됐다는 것이다.

이래저래 양주는 계란 볶음밥과 관련이 깊은데 무심코 먹는 볶음밥 하나에서 다양한 중국을 엿볼 수 있다.

윤덕노 음식문화 저술가

더차이나칼럼

더차이나칼럼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