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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신 못 걷는다"던 환자…12년만에 '벌떡' 일으킨 기적의 신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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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2011년 중국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던 28세 네덜란드인 게르트-얀 오스캄은 자전거를 타다 교통사고를 당했다. 목이 부러지고 척수가 손상 당해 곧바로 병원에 옮겨졌지만 “앞으로 엉덩이 아래는 전혀 움직일 수 없을 것”이라는 하반신 마비 통보를 받았다.

12년이 흘러 40세가 된 오스캄은 최근 간단한 보행 기구의 도움만으로 직접 걸어 나가 친구를 만나고 맥주를 함께 마실 수 있다. 혼자 계단을 오르내리고 가벼운 등산도 즐긴다. 컨디션이 좋은 날은 100m 정도 산책하는 것도 가능하다. 오스캄은 “10여 년 만에 평범하고 자연스럽게 걸을 수 있게 됐다”면서 “이 단순한 변화가 내 인생에 엄청난 기쁨이자 기적”이라고 말했다.

하반신 마비였던 게르트-얀 오스캄(왼쪽)이 뇌와 척수에 이식 수술을 받은 뒤 혼자 힘으로 걷고 있다. AFP=연합뉴스

하반신 마비였던 게르트-얀 오스캄(왼쪽)이 뇌와 척수에 이식 수술을 받은 뒤 혼자 힘으로 걷고 있다. AFP=연합뉴스

사고로 끊어진 뇌·척수 연결망, 무선 연결

오스캄의 삶에 기적이 가능했던 건 그레고아르 쿠르틴 교수가 이끄는 스위스 로잔공과대학 연구팀 덕분이다. 연구팀은 2021년 오스캄의 머리에 양쪽에 구멍을 뚫고 좌뇌와 우뇌에 가로 95㎜, 세로 50㎜, 두께 7~12㎜의 ‘뇌·척수 인터페이스(BSI)’ 센서를 이식했다. 또 척수에는 신경자극이 가능한 짧은 막대 형태의 장치를 별도로 심었다.

뇌의 센서는 오스캄의 뇌에서 ‘걷고 싶다’는 생각이 떠오를 때 발생하는 전기 신호를 감지해 곧바로 척수의 신경 자극기로 무선으로 전달한다. 이 장치는 전달받은 신호를 다리 근육에 대한 명령으로 변환해 다리 움직임을 제어하게 된다. 연구팀은 “교통 사고로 끊어진 오스캄의 뇌와 척수 사이의 신경물질 전달 시스템을 무선 연결하는 새로운 ‘디지털 다리(digital bridge)’를 만들어준 것”이라 설명했다.

오스캄은 이 같은 ‘디지털 다리’를 장착한 최초의 환자다. 그는 BSI 이식 수술 후 5개월 동안 장치 적응과 재활 훈련을 거쳤고, 이후 2년간 정밀 추적 검사를 받아왔다. 그 결과, BSI에 힘입어 일반인과 거의 비슷하게 걸을 수 있고, 울퉁불퉁한 곳에서 등산이나 산책을 하는 것까지 성공했다고 연구팀은 전했다. 신경 재활에도 성공해, BSI의 전원이 꺼진 상태에선 혼자 목발을 짚고 걸을 수도 있게 됐다.

연구팀은 환자가 등에 메고 있으면 지형지물 등을 인식해 디지털 신호로 바꿔 블루투스로 척수와 뇌에 전기 자극을 전달하는 휴대용 컴퓨터도 개발했다. 이를 통해 실시간으로 근육 활동의 타이밍과 진폭을 제어해 지형지물에 따라 환자가 자연스럽게 걷다 서는 등의 동작을 제어할 수 있게 했다.

척수 손상으로 하반신이 마비된 네덜란드인 게르트 얀 오스캄(가운데)이 뇌 이식 수술 후 자연스럽게 걷고 있다. AFP=연합뉴스

척수 손상으로 하반신이 마비된 네덜란드인 게르트 얀 오스캄(가운데)이 뇌 이식 수술 후 자연스럽게 걷고 있다. AFP=연합뉴스

“아기처럼 걷는 법 새로 배우는 느낌”

그동안 과학자들은 뇌와 척수의 연결이 끊긴 환자들에게 뇌에서 오는 신호 대신, 척수로 직접 전기 자극을 주는 방식으로 걷게 하는 법을 연구해왔다. 오스캄 역시 2017년 처음으로 로잔대학병원의 임상 시험에 참여했을 때는, 몸에 부착한 센서로 근육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척수에 전기 자극을 주는 방식으로 걷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이 방식으론 휠체어에서 일어나는 것 정도만 가능하고 자연스러운 걷기는 어려웠다. 이번에 뇌 신호를 무선으로 척수에 전달하는 방식을 적용하고서야 걸을 수 있게 됐다.

오스캄의 치료와 연구에 참여한 기욤 샤베르 프랑스 클리나텍 연구소 의료기기 개발책임자는 “뇌와 척수 사이 신호 전달이 무선으로 작동하면서 주변 도움 없이 환자가 혼자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스캄은 “척수 자극으로만 치료를 받을 때는 시스템이 나를 통제하고 있다고 느꼈지만, 뇌에 센서를 이식받고 받고 나자 내가 시스템을 통제하며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라면서 “아기가 새로 걷는 법을 배우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느낌”이라고 BBC에 전했다.

수술을 집도한 스위스 로잔대학의 신경외과 전문의 조슬린 블로흐 교수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아직은 기초 연구 단계고, 실제 마비 환자에게 적용되기까지는 몇 년이 더 소요될 것으로 예상한다”면서 “우리의 목표는 최대한 빨리 이 시스템을 병원으로 가져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뇌 이식 수술로 걸을 수 있게 된 게르트 얀 오스캄이 의료진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뇌 이식 수술로 걸을 수 있게 된 게르트 얀 오스캄이 의료진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연구팀은 ‘디지털 다리’ 개념이 사고로 인해 마비 등 운동 장애를 보이는 환자들을 치료할 게임체인저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임플란트의 위치 변경을 통해 다리가 아닌 다른 신체 부위의 마비도 개선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쿠르틴 박사는 “오스캄은 사고 후 10년이 지나서야 이식 수술을 받았다”면서 “기술 상용화로 부상 후 몇 주 내에 ‘디지털 다리’ 수술이 이뤄진다면 회복 가능성은 엄청나게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연구팀은 오스캄의 사례와 연구 결과를 25일(현지시간) 과학 전문 학술지 네이처에 게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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