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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진석 칼럼

삶의 승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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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최진석 KAIST 김재철AI대학원 초빙석학교수·새말새몸짓 이사장

최진석 KAIST 김재철AI대학원 초빙석학교수·새말새몸짓 이사장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 이상이다.” 나는 헤르만 헤세의 이 문구를 자코메티의 조각 ‘걷는 사람’에서 읽는다. ‘걷는 사람’은 멈추지 않는다. ‘다음’을 향한 기울기를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그저 걸을 뿐이다. 이들은 다음을 향해 튀어 나가려는 탄성이 있어야 진짜 사람임을 제대로 안듯하다. 사람은 탄성의 속성을 가진 이 힘을 가지고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되는데, 사람은 바로 이 힘으로 시시포스가 천형처럼 바위를 밀어 올리듯이 자신을 메고 한계를 넘으려고 발버둥 치는 상승을 한다. 승화하는 것이다.

자신 넘어서면서 자신이 되는 인간
고유성을 보편화하는 과정이 예술
지지부진 삶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나는 누구인가’ 질문부터 던져라

2012년에 중국 작가 모옌(莫言)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이때 어떤 이들은 사회주의 중국에 타격을 주기 위해 모옌에게 노벨상을 준 것이라 수군대기도 했다. 수군거림에는 언제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름이 따라붙었고, 그 내용은 당연히 무라카미 하루키가 노벨상을 받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예술품에는 승화의 과정이 들어있어야 한다고 본다. 예술적 승화란 자신에게 침범해온 구체적인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과감하게 받아들인 다음, 그것을 어루만지고 또 어루만져서, 마치 기울기를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계속 걷기만 하는 ‘걷는 사람’처럼 자신의 이상을 메고 지고 가다가, 정상에서 누구에게나 충격을 줄 수 있는 상태로 모양을 갖추는 것이다. 이미 있는 ‘좋은 것’을 잘 다듬어서 ‘더 좋은 것’이나 ‘또 하나의 좋은 것’으로 만드는 일은 예술적 승화가 아니다. 구모룡은 예술적 승화의 과정이 어때야 하는지를 잘 알게 해준다. “많은 이들이 하루키와 모옌을 비교하고 있다. 모옌이 구체적인 장소(topos)에 바탕을 두면서 그 장소에 개입하는 국가와 세계의 힘들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한다면 하루키는 무국적성 혹은 미국에 연원한 포스트모더니티의 감성 공간으로 달아나고 있다는 것이다. 노벨문학상이 준거라는 것은 아니지만, 하루키를 제치고 모옌이 그 상을 받은 데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문학의 공간이 막연한 보편성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특수한 장소에서 형성되는 인간의 삶에 관한 수준 높은 해석에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 셈이다.”(『폐허의 푸른 빛』 106쪽) 모옌의 작품에는 중국의 구체적인 역사가 항상 밑자락에 깔렸다. 막연한 보편성을 채택하는 삶은 예술적 승화가 아니다. 구체적인 특수한 문제를 보편화해야 예술적 삶이다.

훈련된 지성이 예술품을 만나면, 안정적인 맥박과 고르게 뛰던 심장이 규칙성을 잃고 불균형 상태로 무너지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균형을 잃고 불안정 상태로 무너지면서 특별한 감정에 휩싸이는데, 우리는 그것을 감동이라 한다. 예술적 감동은 결국 감상자가 예술품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며 피어난다. 예술품의 압도적인 힘을 이루는 가장 밑바탕에는 무엇이 있는가? 의외성이다. 의외적이지 않은 것은 평범하기 쉽고, 예술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의외성은 어디에서 태어나는가? 고유함이다. 우리는 예술품 앞에서 한 인간이 자신에게만 있는 고유함을 보편적인 높이로 승화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꾸준히 걸었는지를 눈치채고 공감하면서 자신의 전체가 반응하는 특별한 느낌을 받는다. 어찌 심하게 떨리지 않겠는가.

어떤 한 사람을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이게 하는, “탄성의 속성을 가진 이 힘”을 ‘덕’(德)이라고 한다. ‘덕’은 궁금증과 호기심을 근본으로 하는데, 탄성의 속성은 바로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만들어진다. 삶의 승화는 고유한 ‘나’가 보편적인 높이를 갖게 상승하는 일이므로, 오직 고유한 ‘나’가 삶의 승화가 일어나는 시발역이면서 종착역이다. 대답하는 자가 아니라 질문하는 자가 세계의 주인 자리를 차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명 전부가 한 톨도 예외 없이 모두 질문의 결과 아니겠는가. 대답은 타인이 발휘한 궁금증의 결과를 먹었다 뱉었다 하는 일이므로, 여기에는 굳이 나의 ‘덕’이 작용할 필요가 없다. 반대로 질문은 자신만의 궁금증을 세상에 내놓는 지적인 용기이므로 ‘덕’이 작용한다. 삶의 승화를 이룬 자가 세상의 주인인 것이 당연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세상의 주인은 바로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었던 자다.

자신의 삶에서 자신이 주인이 아니면, 삶은 승화에서 빗겨 나고 지지부진해진다. 이것은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존재적 문제이다. 지지부진한 삶에서 벗어나 승화의 길에 들고 싶은 생각이 들 때, 우선은 자신을 자신이게 한 그것, 즉 ‘덕’을 살필 일이다. ‘덕’을 살피는 자는 우선 자신을 궁금해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나는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가? 자신을 궁금해하지도 않으면서, 삶이 예술적인 높이까지 승화하기를 꿈꿀 수는 없다. 지지부진한 삶에서 벗어나고 싶거나 정해진 마음이 주는 답답함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우선 자신을 궁금해하라. 자신을 부지런히 궁금해하면, 자신의 삶이 예술적으로 승화하는 것을 경험하며 열락에 빠질 것이다.

최진석 KAIST 김재철AI대학원 초빙석학교수·새말새몸짓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