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연중 기획 혁신창업의 길

“기술이전 최고지만, 상용화 성공 사례는 더 나와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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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최준호 기자 중앙일보 과학ㆍ미래 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연중 기획 혁신창업의 길] R&D 패러독스 극복하자 〈48〉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책임연구원(왼쪽)이 지난 24일 대전 대덕테크노밸리에 위치한 진시스템을 찾아 홍사철 부사장과 만났다. 프리랜서 김성태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책임연구원(왼쪽)이 지난 24일 대전 대덕테크노밸리에 위치한 진시스템을 찾아 홍사철 부사장과 만났다. 프리랜서 김성태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진단치료연구실 이대식(54) 책임연구원의 20년 연구 성과는 이번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중 한꺼번에 꽃 피었다. 전자공학 박사인 그는 2000년 ETRI에 들어와 지금껏 반도체 미세전자기계시스템(MEMS) 기술을 이용한 의료용 진단장비 연구에 집중해왔다. 그의 연구는 서랍 속에 매몰되기 일쑤인 여느 정부출연연구소 연구의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

그가 개발한 바이오칩 리더기 기술은 2011년 당시 ETRI의 연구소기업(정부출연연구기관 등이 보유한 기술을 사업화하기 위해 설립한 기업)으로 창업한 수젠텍에 기술이전 출자된 상태. 또 다른 연구 성과인 ‘플라스틱 마이크로 히터’ 기술은 2015년 당시 창업 5년차 스타트업 진시스템이 ETRI 연구소기업으로 전환할 때 역시 기술 출자된 상황. 두 기업은 이 박사가 이전한 기술로 한 단계 도약해 수젠텍은 2019년, 진시스템은 2021년 코스닥에 상장됐다.

출연연 중 기술사업화 실적 으뜸
기술사업화 투자기관도 첫 설립
투자기업 중 4개사 코스닥 상장
‘연구자 대박’ 사례는 아직 부족

코로나19가 대유행하면서 두 기업의 진단 장비는 불티 나게 팔렸다. 수젠텍은 연매출 1000억원(2022년)을 넘었고, 진시스템도 130억원(2021년)을 넘었다. 코로나19가 엔데믹으로 바뀌면서 두 기업의 수익은 감소하고 있지만, 진시스템은 실시간 현장 사용이 가능한 휴대용 유전자 진단 장비의 인도 결핵 진단 시장 진출로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올해 360억원의 매출을 올릴 것으로 예상한다. 두 기업에 투자한 ETRI도 적지 않은 수익을 올렸다. ETRI 기술지주사인 ETRI홀딩스는 수젠텍 상장 이후 지난해까지 지분 매각으로 85억원 이상의 실적을 올렸다. 진시스템 역시 53억원 이상을 ETRI와 ETRI홀딩스에 안겨줬다.

출연연 기술사업화에 일찍 눈떠

ETRI는 정부 출연 과학기술연구소 기술사업화의 ‘맏형’ 같은 존재다. 흔히 공공 연구개발 프로젝트에 ‘성과가 없다’는 의미로 ‘R&D 패러독스’라는 딱지가 붙지만, ETRI만큼은 예외다. 과거에도 1가구 1전화 시대를 연 TDX 전전자식 교환기 개발(1986), 4M D램을 시작(1989년)으로 한 16M·64M·256M D램 개발 성공, 휴대전화 강국의 초석이 된 CDMA 세계 최초 상용화 성공(1996) 등의 사례가 적지 않다. 최근 들어서도 25개 출연연구소 기술사업화 실적의 절반을 ETRI가 담당하고 있다.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에 따르면 2020년부터 최근 3년간 ETRI의 기술료 수입은 총 1657억원으로, 25개 전체 출연연 기술료 수입의 47% 이상을 차지한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ETRI의 높은 기술사업화 실적은 과거 정보통신부(1994~2008년) 시절부터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 한국 IT기술을 이끌어온 전통의 영향도 있지만, 다른 출연연보다 기술이전과 창업 등 기술사업화에 일찍 눈을 뜬 덕분이기도 하다. ETRI는 2010년 과기 출연연 최초로 기술사업화전문 투자기관인 ‘에트리홀딩스’를 만들었다. 25개 과기 출연연 전체 기술사업화를 담당하는 한국과학기술지주(2013년 설립)보다 3년이나 앞섰다.

설립 이래 최근까지 68개의 연구소기업을 설립해 투자했고, 현재 3개의 기술사업화 투자조합을 운용하고 있다. ETRI홀딩스는 투자에 집중하느라 많게는 10억원대의 당기손실을 기록했으나, 2020년 44억원 당기순익으로 돌아섰고, 지난해에도 21억원 이상의 순익을 올렸다. ETRI와 ETRI홀딩스가 기술·현금출자한 연구소기업 중 코스닥 상장기업만도 4개나 된다. 수젠텍과 진시스템 외에도 신테카바이오(2019년 상장)와 마인즈랩(2021년 상장)에 기술·현금출자한 후 지분 매각을 통해 각각 77억원과 112억5000만원의 실적을 올렸다. 신테카바이오는 유전체 빅데이터 기반의 인공지능 신약개발업체로, ETRI의 슈퍼컴퓨팅 기술을 이전받아 신생아 유전질환 검사와 같은 유전체 분석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다. 마인즈랩은 요즘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디스플레이 속 인공지능 은행원·상담원·뉴스앵커 등  ‘AI휴먼’을 만드는 벤처기업이다. ETRI의 소셜웹 이슈색인·저장·검색기술과 음성인식 기술이 토대가 됐다.

“투자기업 중 25개 3년 내 상장 예상”

대전 유성구 가정동 ETRI 본원 정문에서 동쪽으로 200여m 걸으면 지상 7층, 연면적 2만3039㎡ 규모의 웅장한 흰색 건물이 나타난다. 해발 144m의 동산(매봉산)을 뒤로 하고 앞쪽에 2층 높이의 건물을 붙여서 실제보다 더 커보인다. ‘융합기술연구생산센터’라는 이름의 이 건물은 일종의 창업공간이다. 1~2층에는 3D프린팅 제작소, 밀링·선반 등을 갖춘 기술 지원시설과 협업공간·회의실을 마련했다. 이곳엔 현재 연구소기업과 기술창업기업 50여개가 입주해 있다. 임대료는 10평 기준 10만원으로 저렴하다 보니 평균 5개 팀이 입주 대기 상태다. 융합기술연구생산센터는 국가중요시설 ‘나’급인 ETRI에서 유일하게 출입증 없이 방문할 수 있어 외부인들과 24시간 자유롭게 협업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에트리홀딩스’도 입주해 있다.

윤상경 ETRI홀딩스 대표는 “기술 이전 받은 스타트업의 TRL(기술성숙도)이 상용화 수준까지 오를 수 있도록 투자하고 기술 지원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라며 “투자기업 중 하이브리드 우주로켓 기업 이노스페이스를 비롯해 총 25개 기업이 향후 3년 내에 코스닥에 상장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윤 대표는 “현재 정보통신 융합 딥테크(deep tech) 분야의 초기 기업에 투자를 집중하고 있다”며 “지금까지 연구소기업 85개사를 비롯해 총 117개사에 투자했으며, 이들 기업 가치는 총 1조5000억원에 달한다”고 덧붙였다.

기술성숙도(TRL)는 기술의 상용화 단계를 보여주는 척도다. 1~2단계는 기초연구, 3~4는 실험, 5~6은 시작품, 7~8은 실용화, 마지막 9는 사업화 단계다. 연구소나 대학의 R&D는 대부분 4단계에서 마무리된 뒤 필요할 경우 기업으로 이전된다.

기술 이전 후 지속적 관리 쉽지 않아

돋보이는 기술사업화 실적에도 ETRI의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기술을 이전받은 기업이 자체 R&D 능력 부족으로 상용화까지 성장하지 못하고 주저앉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신정혁 ETRI 기술사업화본부장은 “출연연이 개발한 기술을 중소기업이 그대로 소화하기에는 역량의 문제가 있는 게 현실이고, 반면 대기업은 실용화단계 직전까지 가야 관심을 보인다”며 “이 틈을 메우려면 기술이전 전후 지속적인 지원과 협력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신 본부장은 “연구자가 기업에 기술지원을 하면 기술료와 별도로 인센티브를 주는 등의 내부제도를 올해 새로 시행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ETRI는 기술사업화의 또다른 축인 내부 창업 활성화를 위해 기존 최대 6년까지의 휴직 제도 외에도 겸업 창업제도를 올해 신설했다. R&D를 거친 기술이 민간기업에 이전되는 것보다 연구자가 직접 창업해 상용화까지 이끌어 가는 게 성공률이 더 높다는 판단에서다.

손수정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선임연구위원은 “ETRI가 기술사업화 평가 수치에선 다른 어느 출연 연구기관보다 뛰어난 실적을 올렸지만, 그 기술의 실제 상용화 측면에서 보면 ‘R&D패러독스’라는 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며 “전체 연구비의 70%를 과제 수주 경쟁을 통해 따내고, 이를 통해 연구자들의 월급을 줘야하는 현재의 시스템 하에서는 기술 이전 뒤까지 지속적으로 관리해주기 어려운 실정”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2300명의 연구자를 보유한 국내 최대 출연연 ETRI의 역량을 고려하면 더 많은 상용화 실적이 나와야 한다고 진단한다. 김경환 성균관대 창업대학원장은 “ETRI는 그간 우리나라 출연연 기술사업화의 선두주자 역할을 잘해왔다”면서도 “미국·독일 등의 정부 출연연에서는 민간 기술 이전으로 연구자가 ‘대박’을 터뜨리는 사례가 많은데, 우리는 이를 위한 동기부여나 제도가 많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공대를 나와 연구 결과 이전이나 창업으로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사례가 많이 나와야 똑똑한 학생들이 무조건 의대로 가려고 하는 쏠림 현상이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