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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여자라고 성인 못 되나” 친정·시집 둘 다 일으킨 수퍼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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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수양과 실천’의 여장부 장계향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바다와 산으로 둘러싸인 영해부(寧海府·현재 경북 영덕군 영해면) 인량리의 너른 들녘을 여섯 살 난 동자를 업은 한 여성이 걸어간다. 들판 저 너머 5리 길의 마을 훈장에게 아이를 데려갔다 데려오는 데 여성은 늘 그 시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운 바닷바람에도 개의치 않았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등굣길의 모자는 갓 시집온 스무 살의 장계향(1598~1680)과 2년 전에 엄마를 잃은 이상일이다. 새엄마 장씨는 어미 잃은 아이의 기를 살리고 착한 선비로 길러내겠다는 다짐을 한다. 이를 본 시아버지 이함(1554~1632)은 아이의 죽은 어미가 살아온 것 같다고 한다.

모든 생명 공경, 몰락한 시가 재건
전처 소생 등 10남매 반듯이 키워

“직접 일궈야 내 재물” 처절한 시간
자녀들과 산골 들어가 새 삶 닦아

친정아버지와 이복동생들도 돌봐
첫 한글요리서 『음식디미방』 남겨

‘내가 곧 우주’ 자존감의 경(敬)사상

경북 영양군 두들마을 전경. 장계향과 남편 이시명이 병자호란을 피해 내려와 가문을 일군 곳이다. [사진 영양군청]

경북 영양군 두들마을 전경. 장계향과 남편 이시명이 병자호란을 피해 내려와 가문을 일군 곳이다. [사진 영양군청]

누구의 소생이든 연약한 생명에 정성으로 응대한 장계향의 행위에는 ‘내가 곧 우주’라는 자기 존중감을 바탕으로 사람과 만물을 응대한다는 철학이 깔려 있다. 열 살 무렵의 그녀는 이미 내 몸, 내 존재에 대한 긍정과 공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인식에 이르는데, “이 몸은 바로 어버이의 몸이니, 어찌 감히 이 몸을 공경하지 않으리”(경신음·敬身吟)라고 한다. 공경과 삼감으로 자아를 가꾸고 그 정신과 실천을 외부로 확장한다는 경(敬)의 사상, 아버지 경당 장흥호(1564~1633)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장계향은 시집 가문의 중흥을 주도하였다. 재령이씨 영해파는 입향조 이후 3대에 걸쳐 재지사족(在地士族·지방 지배세력)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특히 이함은 의령현감을 끝으로 고향으로 돌아와 다량의 서적을 갖추어 놓고 후세 교육에 주력한다. 재령이씨 영해파의 번영은 탁월한 재산 경영과 인(仁)의 철학으로 사회적 영향력을 넓혀간 이함이 배경이 되었다.

그런데 이함의 네 아들 시청·시형·시명·시성이 출사할 즈음에 갑자기 몰아친 불운으로 가문은 위기를 맞는다. 차남과 장남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차례로 급서하고 남편을 잃은 두 며느리가 연달아 자결하는 변고가 발생한 것이다. 셋째 며느리의 사망까지 불과 5년 사이에 20~30대의 젊은 사람 5명이 사라져버렸다. 이 암울한 집안에 재건의 열쇠를 쥔 장계향이 등판하게 된다.

교육과 살림, 30명 대가족 이끌어

2018년 영양군서 개원한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 전시장. [사진 영양군청]

2018년 영양군서 개원한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 전시장. [사진 영양군청]

사실 운이 다한 듯한 집안에 무남독녀를 시집보낸다는 것은 사상적 지지나 자신감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게다가 어린 남매가 기다리는 재취 자리다. 경당은 한때 자신의 문하에서 빛을 발하던 스무 살의 이시명(1590~1674)이 혹독한 변고를 겪고서 초췌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을 때 애잔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술잔을 기울이며 위로의 긴 시간을 보내면서 제자의 맑은 기운과 학문적 역량에 경도되며 스승은 딴마음을 품게 된다. 경당은 아침저녁으로 학술과 도덕을 함께 논하던 딸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 자신의 딸이라면 몰락의 조짐을 보이는 한 집안을 재건할 것이라는 자신감도 들었다.

장계향이 남긴 최초의 한글 요리서 『음식디미방』 원본. [사진 영양군청]

장계향이 남긴 최초의 한글 요리서 『음식디미방』 원본. [사진 영양군청]

겨우 스무 살의 장계향은 실의에 빠진 시부모를 위로하고 전처소생의 어린 남매를 양육하는 등 30여 명의 식구를 건사하는 대가족의 주부로 삶의 새 장을 연다. 그녀의 가문 의식은 “남이 넉넉할 때 내 많은 재물은 자랑일 수 있지만 남이 모두 없는데 홀로 많이 가진 것은 재앙”이라고 한 말에서 드러나듯 사회를 향해 열려 있다. 이후 25년 동안 장씨는 7남 3녀의 출산과 양육, 그리고 교육과 혼인을 주관하며 활발한 청장년기를 보낸다.

역병과 자연재해가 일상이 된 17세기의 외진 고을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10남매의 부모로 산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생존과 다투는 날들이었다. 이러한 절박한 환경에서도 장계향은 직접 일구지 않은 재물은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자식 교육에 도전과 노력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고 여겼다.

“강학 열어 자식들 미래 준비하자”

장계향이 10세 전후에 그린 ‘맹호도’. [사진 영양군청]

장계향이 10세 전후에 그린 ‘맹호도’. [사진 영양군청]

당시 이시명은 임금이 청나라에 굴복한 사건에다 지역인의 모함으로 죄인 취급을 받으며 서울로 압송되는 모욕을 당한 사건이 겹치면서 세상과 인간에 대한 불신에 차 있었다. 실의에 빠진 남편에게 힘을 실을 겸 장씨는 “강학을 열어 자식들의 미래를 준비하자”고 제안한다. 이에 부부는 분재(分財·가족이나 친척에 나눠준 재산)로 받은 영해의 넉넉한 들녘에 안주하지 않고 자녀들을 데리고 산골 마을 석보(石保)로 들어가 최소한의 토지를 기반으로 새로운 형태의 삶을 모색한다.

석보 생활 12년 동안 삶과 죽음이 교체되고 나가고 들어오는 등의 구성원들 변화를 지켜보면서 더 산간 오지 수비(首比)로의 이거를 단행한다. 근거지를 버리고 더 나은 환경으로 옮기는 경우는 많지만 장계향 부부처럼 더 열악한 곳을 선택하는 경우는 예나 지금이나 특별한 모습이다. 부모의 뜻이 무엇인지를 안 자식들은 직접 일해야 먹을 수 있는 생활을 선택하며 혼인한 자들까지 따라나서 식구는 20명에 이르렀다.

장계향의 친정인 경당 장흥효 종택. 경북 안동시에 있다. [사진 안동시청]

장계향의 친정인 경당 장흥효 종택. 경북 안동시에 있다. [사진 안동시청]

훗날 이 가문의 위상을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갈암 이현일(1627~1704)은 수비에서의 생활을 기록으로 남겼다. “나는 은둔할 목적으로 부모님을 따라 이곳 수비에 와서 띠풀을 엮어서 집을 짓고 물을 퍼 올려 채마밭을 일구었다. 여기서도 가족 강학은 계속되었다.”(‘갈암기·葛庵記’)

쉽고 편한 것에 안주하지 않고 쉼 없이 자신을 갈고닦는 이 삶의 자세는 어디서 온 것인가. 친정아버지에게서 가르침을 받던 소싯적의 장계향은 성인(聖人)을 꿈꾸었다. 그녀는 “성인도 사람이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면, 나도 노력한다면 성인이 되는 데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라고 한다. (‘정부인장씨행실기’) 산간오지에서 보낸 30여년의 세월은 부모에게는 수양과 성찰의 시간이었고, 자식들에게는 근본에 충실한 학문 연마의 시간이었다.

한국 음식문화사의 새 장 열어

장계향 영정

장계향 영정

특히 장계향은 이 기간에 지역의 약초나 토산물을 활용하여 기근과 궁핍, 질병을 해결하였다. 또 건강의 바탕을 음식으로 보고 수십 년에 걸쳐 연구하고 실험한 결과를 모아 최초의 한글 조리서 『음식디미방』을 저술한다. 이 책은 350년이 지난 지금도 전통 음식문화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무남독녀 장계향은 어머니의 타계로 홀로 남겨진 아버지에게 달려가는데, 영해에서 안동 친정까지는 200리 길이다. 20대 중반 나이에 수십 명을 건사하는 주부였지만 시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의 배려로 친정살이하며 아버지 경당을 봉양한다.

그런데 학봉 김성일과 서애 유성룡을 통해 퇴계학을 전수하여 심학(心學)으로 발전시킨 대학자 경당은 수백 명의 문인에 학인들의 존경을 받는 위치에 섰지만, 대(代)가 끊긴다는 사실에서 딸이 가졌을 법한 비애는 짐작이 된다. 장계향은 아버지의 재혼을 성사시킨 후 시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10여년 후 어린 자녀들을 남기고 아버지가 타계하자 어린 이복동생들을 자기 곁으로 데려와 돌보며 삶의 터전을 마련해준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뒤를 이을 학자로 성장하도록 정성을 다했다. 경당 가문의 후손들에게 장계향은 특별한 존재로 기억되고 있었다.

훌륭한 아들들 키운 숭고한 삶

장계향의 아들 현일은 학문이 완숙해진 52세에 학행으로 출사하여 영남 사림의 종장이자 산림정치가로 크게 이름을 떨친다. 아들 휘일은 아우 현일과 합작으로 『홍범연의』를 저술하는데, 여기에는 국가 재건을 염두에 둔 경세철학이 담겼다. 다른 아들들도 학문으로 각자의 세계를 만들었는데, 이는 가문의 명운을 걸고 절차탁마한 긴 시간의 결과물이다. 재령이씨 영해파는 이함과 이시명, 그리고 휘일·현일 형제, 3대가 나라에 큰 공훈을 남긴 사람에게 주는 불천위(不遷位)의 영예를 받기에 이르렀다.

85세 나이로 이시명이 운명하자 아들들이 모두 모여 여묘살이를 한다. 이때 이현일은 『논어』를 강론하고, 어머니 장계향은 『논어』의 실천과 일상화의 중요성을 말한다.(‘석계연보’) 장계향은 자신을 모시려는 소생 아들들의 청을 거절하고, 장남 상일에게 남은 생을 의탁한다. 추위를 막느라 업어서 등교시킨 60년 전의 그 아들이다. 전 생애를 오롯이 경(敬·수양과 실천)의 정신으로 일관한 장계향의 삶은 숭고했다.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